나는 '야만인'… 命을 재촉해도 무대 오른다

입력 : 2012.03.02 23:17

연극계의 살아있는 전설, 87세 대배우 백성희
연습하다 갈비뼈 금 갔는데도 압박붕대 동여매고 다시 연습… 재공연 들어간 '3월의 눈'서 열연
54년 매릴린 먼로 방한 때 마중 "잘생겨서 세계를 잡은 여자… 그러나 정통 예술가는 아니지"

한국 연극계의 살아있는 전설, 백성희(87)는 스스로를 '야만인'이라고 했다. "내 명(命)을 내가 재촉하고 있으니 이게 말이 되나.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내겐 무대에 서는 게 좋고 싫음의 문제가 아니라, 사명이고 운명이니까."

1일부터 재공연에 들어간 연극 '3월의 눈(雪)'(연출 손진책)에 출연하는 그는 지난달 연습 도중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오른쪽 갈비뼈에 금이 갔다. 의사는 '회복에 최소 8주는 걸리니, 반드시 쉬라'고 했다. "알겠다" 하고 병원에서 나선 그는 압박붕대로 상반신을 친친 동여매고 연습장으로 갔다.

◇"갈비뼈에 금 갔지만 연극을 위해서"

개막을 이틀 앞둔 지난달 28일, 그의 이름을 딴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연습 중인 그를 만났다. 최종 리허설을 마친 그는 "티 났어요?" 하고 먼저 물었다. "아픈 거 관객이 알면 안 되는데…. 힘주면 고통스러워요. 발 디딜 때도 한 발짝씩 살살 디디지. 압박붕대 때문에 소화가 잘 안 돼 힘들어요. 그래도 연극 하나만 위해서 하는 거예요."

티는커녕, 육신의 고통은 흔적조차 없었다. "가만히 서 있어도 연기가 된다"는 평가 그대로, 그는 완벽하게 현실의 백성희를 벗고 작품 속 아내 이순이 됐다. 지난해 남편 역으로 나왔던 배우 장민호(88)는 노환으로 서지 못한다. 대신 배우 박근형(71)이 맡아 오랜만에 무대에 섰다. 두 사람은 40년 전 국립극단에 함께 있었다. 박근형은 백성희를 평소에 "어머니"라고 부른다. 백성희는 "남편이 젊어졌다"고 농담했다.

‘가만히 서 있어도 연기가 된다’는 대배우 백성희는 후배에게“박수를 가려 들을 줄 알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지난달 28일 서울 서계동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가만히 서 있어도 연기가 된다’는 대배우 백성희는 후배에게“박수를 가려 들을 줄 알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지난달 28일 서울 서계동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지난해 '3월…' 초연은 객석 점유율 110%로 연극계를 놀랬다. 보조석을 놓고도 자리가 없어, 왔다가 돌아간 관객이 부지기수였다. 관람에 '성공'한 관객들은 붉어진 눈시울로 극장을 나섰다. 작품에는 대단한 사건도, 엄청난 반전도 없다. 철거 위기에 몰린 한옥에 사는 노부부의 하루가 담겼을 뿐이다. 그런데, 울린다. 아내가 끝내 다 짜지 못한 카디건을 남편에게 입혀주자, 남편은 아내를 말없이 껴안는다. 곧 녹아버릴 눈이 작별 인사처럼 내리고, 객석에서는 눈물이 비처럼 내린다. 백성희는 "우리 정서가 담겼고 구성이 완벽해서 마음에 든다"며 "새파란 작가가 썼더라"고 말했다. 그 '새파란' 작가는 올해 41세, 우리 연극계의 대표적인 극작가 배삼식이다. 배 작가는 처음부터 백성희·장민호 두 배우를 염두에 두고 집필했다.

'이순'이라는 주인공 이름은 백성희의 본명 이어순이(李於順伊)에서 나왔다. 백성희가 배우가 된 이후 쓰지 못하던 이름이다. 맏딸이 '천직(賤職)'인 배우가 되는 것을 극렬히 반대하던 부친 때문이었다. 동덕여고(5년제) 4학년 되던 17세에 빅터무용연구소에 입소한 그는 방과 후에 몰래 연구소에 드나들었다. 사실을 알게 된 부친이 "광대가 되겠다는 것이냐"며 문을 걸어 잠갔다. 백성희는 사흘 동안 드러눕고, 부친은 사흘 동안 폭음했다. 나흘 만에 만난 부친이 "죽어도 연극 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래. 해라. 하지만 내 자식이 아니다"던 부친은 "연극 안 하고 다른 일 하면 사람이 아니다"는 말로 반쯤 허락했다.

먼로와 팔짱 낀 백성희 1954년 백성희는 주한 미군 위문 공연차 대구를 찾았던 매릴린 먼로의 마중 사절로 동촌비행장에 나갔다.
◇"매릴린 먼로, 잘생기긴 했지만"

70년 가까운 세월, 연극을 400편 가까이 했다. 그는 "잠 안 오는 밤이면 가만히 누워서 출연작을 헤아려 본다"며 "360편까지는 기억이 나더라"고 했다. 대통령상·은관문화훈장 등 배우가 받을 수 있는 모든 상을 받았다. '평생 무대지기' '연극을 예술로 지켜온 파수꾼' 등 별명도 많다. 1972년 국립극단 사상 최초로 시행된 직선제에서 최연소(47세) 여성 단장이 되며 연극사를 새로 쓰기도 했다.

그가 1954년 대구 동촌비행장에 주한 미군 위문 공연을 왔던 매릴린 먼로를 마중 나간 사실은 유명하다. 당시 먼로에 대한 기억을 묻자 "잘생긴 여자"라고 평가했다. "잘생겨서 세계를 주름잡은 여자야. 그러나 정통 예술가는 아니지." '예술가'로서 그의 자신감은 꼿꼿하다. "난 내가 작품을 만들어요. 여기서 관객을 울리겠다고 하면 울리죠. 만세 부르게 하겠다고 하면 부르게 하고."

그는 연극 후배들에게 "박수 받았다고 좋아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박수도 가려야 해요. 스스로 보기에 잘한 것 같지 않은데, 관객이 손뼉 치면 반성해야 해. 관객과 같이 고민할 수 있을 정도로 내가 표현하지 못한 것이 아니냐고 스스로를 돌아봐야죠." 이 대배우의 연기를 볼 날이 몇 번이나 더 허락될까. '3월의 눈'은 18일까지 공연한다. (02)3279-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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