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객석에서] 건반위 질풍노도의 10년… 격렬함과 서정, 깊숙한 공존

입력 : 2012.02.19 23:18

임동혁 독주회

18일 서울 예술의전당. 황금빛으로 머리를 물들인 피아니스트 임동혁(28)이 개구쟁이처럼 천진난만한 미소를 띠고 무대 위로 걸어왔다. 피아노 앞에 앉은 그는 손수건으로 정성스럽게 건반을 닦고 한참이나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건반 위로 손을 가져갔다. 2002년 국내 첫 리사이틀의 10주년을 기념하는 독주회였다.

롱티보와 퀸 엘리자베스, 쇼팽과 차이콥스키 등 세계 유수의 콩쿠르 입상과 수상거부, 결혼과 때 이른 이혼까지 등 임동혁은 자신이 즐기는 스포츠카 운전처럼 20대를 질주해왔다. 하지만 차이콥스키의 '사계'가운데 첫 곡 '난롯가에서'부터 임동혁은 무척이나 덤덤하고 소박하게 풀어나갔다. 1년 12개월을 12곡의 짧은 소품으로 묶어낸 이 독주곡은 비발디와 하이든, 피아졸라의 동명(同名) 작품과 함께 계절의 변화를 음악으로 표현한 대표적 작품으로 꼽힌다.

18일 예술의전당 독주회에서 임동혁은 차이콥스키와 라흐마니노프 등 러시아 작곡가의 작품들을 연주했다. 임동혁은 10세부터 10년간 러시아에서 피아노를 공부했다. /크레디아 제공
18일 예술의전당 독주회에서 임동혁은 차이콥스키와 라흐마니노프 등 러시아 작곡가의 작품들을 연주했다. 임동혁은 10세부터 10년간 러시아에서 피아노를 공부했다. /크레디아 제공

하지만 두 번째 곡 '사육제 주간'부터 임동혁은 특유의 흥얼거림을 가미하면서, 지극히 재기발랄하고 리듬감 있게 다가갔다. 해외 명문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면서도 결코 주눅이 들지 않는, 두둑한 뱃심이나 건반 위에 눈부신 음색을 투사하는 서정성이야말로 이 연주자가 지닌 매력이다. 음악계 원로들은 때때로 지나친 개성이라며 눈살을 찌푸리지만, 그 개성 때문에 지금도 '오빠부대'를 끌고 다닌다.

곡의 템포가 빨라질수록 입으로 그가 뱉어내는 읊조림 소리도 더불어 커졌고, 격렬함과 온화함의 대비도 점점 더 뚜렷해졌다. 악당처럼 짓궂은 격렬함과 미소년처럼 천진난만한 서정성은 어쩌면 이 연주자의 내면에 나란히 공존하는 두 세계일 것이다. '사계'에서 친숙한 '뱃노래'에서 선율을 연주하는 오른손에는 마치 대중음악을 듣는 듯한 편안함으로 가득했고, 우수 어린 '가을의 노래'에서 진득한 감정 표현으로 이어졌다.

후반부에도 차이콥스키에 이어 라흐마니노프의 전주곡과 피아노 소나타 2번을 배치하며 그는 러시아의 서정성을 이어갔다. 콩쿠르 연주곡이나 음반 때문에 흔히 그를 '쇼팽 스페셜리스트'로만 기억하기 쉽지만, 실은 그는 10세 때 러시아로 이주해서 10년간 모스크바에서 공부했다. 차이콥스키의 낭만주의에서 라흐마니노프의 후기 낭만주의로 나아갈수록 건반 위의 중량감도 필수적이지만, 그가 표현하는 우수나 애상의 농도는 다소 옅었다. 이를테면 러시아 대륙의 감수성이 임동혁이라는 필터를 통과하는 순간, 감각적이고 즉물적으로 변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객석의 따뜻한 환호와 함께 앙코르로 쇼팽의 작품 3곡을 연이어 들려주자, 마치 세계 콩쿠르에서 선전(善戰)했던 10년 전의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질풍노도 같은 10년이 흘렀지만, 음악을 시작했던 때의 초심만은 잃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도 더불어 간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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