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등에 업힌 손주 같은 '어린이 정경'

입력 : 2011.11.01 23:43

[공연리뷰] 머레이 페라이어

나이가 들면 아이처럼 순수해진다고 했던가. 29일 예술의전당에서 3년 만에 독주회를 연 피아니스트 머레이 페라이어(Perahia·64)는 여섯 살 꼬마라도 된 양 어깨를 들썩이며 슈만의 '어린이 정경'을 그려 나갔다. 페라이어는 이 시대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전 세계 주요 콘서트홀을 무대로 정상급 오케스트라와 연주해왔다.

작곡가가 자신의 유년을 떠올리며 썼다는 이 곡은 13개의 소곡 앞에 붙여진 제목만 봐도 순진무구한 동심의 세계가 아기자기하게 쏟아진다. 페라이어는 약간 구부정한 자세로 골목길에서 뛰노는 아이들('술래잡기')과 꾸벅꾸벅 졸다 잠자리에 드는 어린이('어린이는 잠잔다')를 대비되게 소화했다. 손가락을 건반에 스치듯 교묘하게 움직여 표현하는 피아니시모(pp·매우 여리게)는 매우 아름다웠다.

바흐·베토벤·브람스·슈만·쇼팽으로 차린 프로그램은 3차원 입체 영상처럼 흥미진진하게 살아 움직였다. 1부는 바흐의 '프랑스 모음곡 5번'으로 열었다. 밝고 따뜻한 선율 속에 우아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곡이지만 페라이어는 선율보다 화음에 집중하며 진지한 뉘앙스를 살렸다. 바로크 음악이 지닌 원초적 재미도 살짝 드러냈다. 알르망드·쿠랑트·사라방드·지그 등 춤곡으로 구성된 악장들을 한쪽은 경쾌하게, 다른 쪽은 리듬과 템포를 절제하며 정중동(靜中動)을 극대화했다.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독주회 연 페라이어. /크레디아 제공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독주회 연 페라이어. /크레디아 제공
페라이어는 25세 때 욕심 없이 참가한 리즈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43세 때 악보에 베인 오른쪽 엄지손가락의 상처가 덧났고 손가락뼈에 변형이 와 수차례 수술을 받아야 했다. 페라이어는 아카데미 오브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를 지휘하면서 끊임없이 재기를 준비했고, 1990년대 후반 한층 깊어진 연주로 컴백했다.

이날 연주회에서는 그의 얼굴에 새겨진 주름살처럼 세월의 흐름이 묻어났다. 2002년 첫 내한 때와 비교해 이번 연주는 음량의 강약 대비가 줄고, 입을 딱 벌리게 할 만큼 야무졌던 손가락 끝의 움직임도 확실히 무뎌졌다. 하지만 무대에서 30년을 산 연주자는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깔끔하고 정갈한 음색으로 신체적 아쉬움을 날려버렸다.

베토벤 '소나타 27번'은 말싸움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1악장과 이를 풀려고 화해를 시도하는 2악장이 뚜렷한 대비를 이뤘고, 브람스 만년의 심경이 우러나는 '4개의 소곡'은 노경의 쓸쓸함보다 생동감을 강조했다. 모차르트와 더불어 그의 최대 장기인 쇼팽에서는 음향을 풍성하게 표현하기 위해 페달을 깊숙이 밟았다. '전주곡'은 소용돌이치는 듯한 음형을 날렵하게 전개하는 노련미가, '마주르카'에서는 그의 멘토였던 호로비츠의 해석을 감상하듯 자연스럽게 흐르는 속도감이 돋보였다. 거침없는 옥타브의 질주가 특징인 '스케르초 3번'에서는 화려한 기교와 극단적인 강약으로 작품의 거대한 윤곽을 또렷이 드러냈다. 노년의 성숙함과 유년의 천진난만함이 씨줄과 날줄로 엮인 연주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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