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더 막돼먹었어요

입력 : 2011.09.08 03:13   |   수정 : 2011.09.08 11:11

뮤지컬 '막돼먹은 영애씨' 여주인공 오디션 현장 가보니
"누군들 산소 같은 영애씨 되고 싶지 않겠느냐만은…" 지원자 평균 나이 33세·70㎏, 여자 속 시원하게 뚫어줄게요

"이 세상에서 호환 마마보다 더 무서운 게 뭔지 아십니까? 바로 영계입니다. 우리 사회는 왜 혼기 꽉 찬 여자들보다 말 잘 듣는 어린 친구들만 찾나요? 저도 공연하면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보니 언젠가부터 '기(氣) 센 여자' 소리를 듣게 되더라 이겁니다."

"저, 야식 먹다가 엄마한테 등짝 많이 맞았습니다. 밖에 나와서 성질 부리고 전쟁 일으키고 이런 사람들, 그거 다 못 먹어서 스트레스받아서 그런 짓들 하는 거예요."

5일 오후 서울 대학로 컬처스페이스 엔유. 무대에 오르는 여배우들은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냈다. 뮤지컬 '막돼먹은 영애씨'의 여주인공 오디션 현장. 동명(同名)의 드라마에서 열연을 펼치고 있는 개그우먼 김현숙과 함께 더블 캐스팅될 여배우를 찾는 자리다.

주인공 '영애씨'는 뚱뚱하고 못생겼지만 당당하게 세상과 맞서 나가는 여성. 그런 캐릭터를 찾는 오디션인 만큼 여느 뮤지컬 오디션 현장과는 확연히 달랐다. 응시자격은 '막돼먹은 세상에 화끈하게 맞서다 스스로 막돼먹어 버린 영애 같은 여자'. 지원자 평균 나이 33세, 평균 몸무게는 70㎏. 몸무게가 45㎏이라는 한 여배우는 지원서에 "몸무게 미달로 서류에서 떨어질까 걱정된다"며 "2주일만 시간 주시면 60㎏까지는 충분히 찔 수 있다"고 적어냈다.

5일 오후 서울 대학로 컬처스페이스 엔유에서 뮤지컬 ‘막돼먹은 영애씨’ 오디션에 참가한 배우들이 포즈를 취했다.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5일 오후 서울 대학로 컬처스페이스 엔유에서 뮤지컬 ‘막돼먹은 영애씨’ 오디션에 참가한 배우들이 포즈를 취했다.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103명의 지원자 중 서류를 통과한 25명의 '영애씨'들이 차례로 무대에 올랐다. 막강한 비주얼의 그녀들이 '내가 왜 영애씨여야 하는가'를 강력하게 호소할 때마다 심사위원석에서 폭소가 터졌다. 민소매 상의에 부스스한 파마머리를 한 나정숙(30)씨는 "출산드라 김현숙씨랑 닮았다는 말을 평소에도 많이 들었다"며 "이 외모로 30년 꿋꿋이 살아왔다"고 했다. "그동안 뮤지컬 주인공 하면 예쁘고 가녀린 캐릭터라고 공식이 정해져 있었잖아요. 빛나는 조연으로 남아야지 하면서도 언젠가 나랑 딱 맞는 캐릭터가 나타날 거라 기대했습니다. 공고 본 순간 '이건 내 작품이다' 했어요."

몸뻬 바지를 입고 맥주 캔을 손에 쥔 채 등장한 김정현(27)씨는 "다이어트? 그딴 거 뭐 하러 해?"라고 말하는 장면을 실감 나게 연기해 박수를 받았다. "저는 이 드라마 보면서 펑펑 울었어요. 외모도 저랑 비슷하지만 불의를 보면 못 참고 술 좋아하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까지…." 155㎝, 58㎏이라는 그녀는 "친구들이 영애씨 오디션 보러 간다니까 '야, 너 어중간해. 더 쪄야 돼'라고 했다"며 좌중을 웃겼다.

검은 치마를 입고 무대에 오른 오은미(34)씨는 "누구는 산소 같은 영애씨처럼 살고 싶지 않았겠느냐. 드라마에서 막돼먹은 영애씨가 겪는 일들이 제가 겪은 일들이랑 비슷했다. 여자들 속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캐릭터"라며 "무대 위에서 솔직하고 당당한 에너지를 여성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싶다"고 했다.

'오피스 뮤지컬'로 탄생할 '막돼먹은 영애씨'는 11월 개막할 예정이다. 지난달 암으로 요절한 극작가 안현정씨의 유작이다. 연출가 이재준씨는 "대한민국 대다수 사람이 남의 돈을 받고 사는 회사원인 만큼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공감을 끌어내고 싶다"며 "국내 무대에서 예쁘지 않은 여배우가 설 자리는 많지 않다. 외모는 좀 빠지지만 연기와 노래 실력을 갖춘 배우들이 많이 지원을 해서 성과가 좋았다"고 했다. 발표는 14일.


 


 

5일 오후 대학로에서 뮤지컬 '막돼먹은 영애씨' 오디션.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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