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 화가 이강소 머리를 비우다

입력 : 2011.08.30 03:06

Natural 전 내달 16일부터
머리 안 쓰고 몸 가는대로… 두뇌가 개입할 여지 안 주려 붓 잡으면 섬광처럼 그려
畵歷 40년… 다시 '소멸' 탐구

1973년 서울 안국동 걸스카웃회관 지하. 갑자기 선술집이 '급조'됐다. 낡은 탁자와 의자에 앉은 사람들이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세상 사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급조된 선술집은 명동화랑이라는 번듯한 전시장이었고 선술집에서 벌어진 모든 일은 퍼포먼스였다. 당시 30세의 젊은 작가는 첫 개인전을 '소통의 공간'으로 만든 파격 시도를 한 것이다.

"사람들은 '주막집'이라고 불렀지만 사실 그 퍼포먼스 원래 제목은 '소멸'이었어요. 탁자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떠나고 주모가 탁자 위에 떨어진 담뱃재마저 닦아버리면 좀 전에 거기 앉아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이야기하며 '있었던' 것들도 모두 없어져버리는 거지요. 세상 모든 게 다 그래요."

25일 경기도 안성의 작업실, 정엽의 '가시꽃'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중견 화가 이강소(68)가 38년 전 이야기를 하며 담배를 피워물었다. 그는 9월 16일부터 서울 청담동 PKM 트리니티 갤러리에서 개인전 'Natural'을 갖는다. 이번 전시의 출품작은 50여점. 1970년대 중반 제작한 미발표작부터 지난해 그린 신작까지를 총망라해 이강소의 40년 화력(畵歷)을 짚어보는 전시. 명상적 세계에 침잠하면서 '국외자(局外者)'적 행보를 보여온 작가의 진면목을 살피기에 적합하다.

1970년대 중반 캔버스의 올실을 뽑아 화폭 위에 형태를 만들고, 실크스크린 기법을 이용해 사진을 캔버스 위에 옮기는 등 평면을 놓고 갖가지 실험을 했던 작가는 1980년대 후반부터 회색이나 청회색 화면 위에 추상화된 오리 떼가 떠 있는 그림들을 선보였다. 이 오리들은 이후 이강소 그림의 트레이드마크가 되며 그에게 '오리 화가'라는 별칭을 붙여줬다. "어느 추운 겨울날 과천 동물원에 갔는데, 연못의 얼음이 깨진 사이로 오리들이 팔딱거리고 그 위로 햇살이 찬란하게 비쳤죠. 그 생명력 넘치는 모습을 그림으로 표현해보고 싶었어요. 당시 유행하던 추상표현주의 영향에서 벗어나 내 나름의 '이미지'를 용감하게 시도한 계기가 됐죠."

“내 작품이 어렵다고요? 붓질 몇 번 슥슥 하면 나오는 작품 속 오리처럼 이해하기 쉬운 작품인데….”벽에 걸려 있는 그림은 작가 이강소의‘虛-Emptiness’연작 중 한 점. /안성=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내 작품이 어렵다고요? 붓질 몇 번 슥슥 하면 나오는 작품 속 오리처럼 이해하기 쉬운 작품인데….”벽에 걸려 있는 그림은 작가 이강소의‘虛-Emptiness’연작 중 한 점. /안성=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그 후로 20년, 이강소는 다시 '소멸', 즉 '있음'과 '없음'의 문제로 돌아가 있다. 그가 2008년 무렵부터 시도하는 '虛-Emptiness' 연작은 대형 캔버스 위에 단숨에 획을 그어 추상화된 형태를 만든 후 남은 공간에 오리·배·집 등을 연상시키는 형상을 그려넣는 작업이다. 작가가 기운을 가득 담아 제멋대로 그려넣은 형상은 관객의 머릿속에 구름·호수·산 등을 연상시키지만 정답은 없다.

작가는 "가능하면 표현하지 않고 표현하는, 그런 작업을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허(虛)'라는 것은 단순히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만물의 물리학적 구조랄까. 요즘 작가들의 작업에는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가득 배어 있죠. 저는 역으로 '그 욕구를 약화시키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두뇌가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붓을 잡으면 섬광처럼 단번에 그린다고 했다. "저 자신도 예측 못 한 형태들이 제 삶의 궤적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저는 그게 좋습니다."

지난 2001년 아들(당시 25세)을 감전 사고로 잃은 작가는 "그 이후 '소멸'을 주제로 한 초기 작업과 더 가까워졌다"고 말했다. "'우리'라는 게 지금 어디 있어요? 없어요. 금방 지나면 찾을 것이 없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신비하고, 놀라운 일 아닙니까." 전시는 10월 29일까지. (02) 515-9496
3년 만에 개인전을 여는 화가 이강소. 그는 그림을 그릴 때 무엇을 그린다는 생각 없이 붓을 잡는다고 했다. /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