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랑 프티를 기억하며…
테일러 핵포드 감독의 영화 '백야'(1985)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파사칼리아와 푸가'가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미하일 바리시니코프가 추는 모던발레 '젊은이와 죽음'으로 시작한다. 이 춤을 만든 프랑스 안무가 롤랑 프티Roland Petit가 지난 7월 10일,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만년의 프티와 가장 많은 작업을 함께 한 파리 오페라 발레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사인은 백혈병이다.
영화에 단편적으로 사용된 '젊은이와 죽음'은 프티의 이름을 알린 출세작이다. 1946년 초연될 당시 프티는 겨우 22세였다. 35년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프티와 잘 통하는 상대였던 장 콕토의 대본은 다음과 같다.
“다락방 아틀리에. 한 남자가 초조하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환영幻影일까, 현실일까? 그에게 고통을 안겨주었을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난다. 여자는 차갑고 강하다. 남자가 여자 쪽으로 달려가지만 그녀는 남자를 피하고 밀쳐낸다. 남자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한껏 조롱하다가 손끝으로 밧줄을 가리키고는 나가버린다. 절망한 남자는 목을 맨다. 다락방 벽체가 높이 올라가고 파리 시내의 휘황찬란한 불빛이 그의 죽음을 맞는다. 해골의 탈을 쓴 죽음의 여인이 나타나 가면을 벗으면 바로 아까 여자다. 여자는 죽은 남자를 불러내 그의 얼굴에 해골 탈을 씌운다.”
이 춤을 보면 누구나 그 무게에 압도당해서 롤랑 프티를 깊은 사색의 예술가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젊은 프티는 한창 심취해 있던 미국 재즈를 사용해 팜므 파탈과 젊은 남자의 관계를 감각적으로 그려내는 데 관심이 있었다. 반면 콕토는 삶의 고뇌와 죽음의 유혹을 진지하게 다루고 싶었다.
그래서 프티에게 음악을 바꿀 것을 계속 요구했고, 프티는 초연을 겨우 며칠 앞두고서야 바흐로 바꾼 것이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관객들은 프티를 화려한 감각과 깊은 철학성을 겸비한 젊은 천재로 여기게 된다.
그러나 3년 후 프티 경력의 절정을 기록한 '카르멘'(1949)은 온통 감각으로 넘실거릴 뿐이다. 남국적 정서가 확연한 원색의 색감,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린 발레리나들, 코미디언 같은 투우사의 춤 등이 모두 시각적 쾌감을 자극하는 것이지 주인공의 비극과는 거리가 있다. 게다가 초연 당시 검은 코르셋에 화사한 장식이 붙은 카르멘의 의상은 외설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젊은 프티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카르멘의 비극보다 팜므 파탈의 에로틱한 감수성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프티 고유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프티의 춤에 에로틱한 분위기와 대중적인 센스가 강하게 드러나는 것은 어렸을 때의 기억에서 비롯된다. 부친은 일찍부터 카바레를 운영했는데 특히 독일군이 프랑스를 점령한 시기에 큰돈을 벌었다. 덕분에 파리 오페라 발레의 평단원에 불과했던 프티는 겨우 20세의 나이에 자기 발레단을 만들 수 있었다. 또 발레단을 위해 슈즈를 만들기 시작한 모친의 아들 사랑은 뒷날 세계적인 명품 발레 슈즈와 구두 브랜드로 성장한 ‘레페토’를 탄생시켰다.
프티의 궤적은 행복한 인생의 연속이었다. 발레단에 뒤늦게 합류해 '카르멘'의 타이틀 롤을 초연한 발레 학교 동기이자 동갑내기 친구 지지 장메르는 평생의 배필이자 예술적 동반자가 되었다. 1950년대에는 부부가 함께 할리우드를 기웃거리면서 탭댄스의 달인 프레드 아스테어와 의기투합하는가 하면 1970년대 초반에는 부친을 흉내 낸 카바레를 운영하기도 했다. 아내 지지 장메르는 여기에서 샹송을 불러 남다른 실력을 발휘했으니 그야말로 부창부수(夫唱婦隨)의 전형이 아닐까. 그러다가 1972년부터 마르세이유 국립 발레의 초대 예술감독을 맡아 무려 25년간 이 단체를 이끌면서 기나긴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그의 작품은 줄거리를 충분히 묘사하면서도 남녀 무용수의 매력을 최고로 끌어올린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무대장치와 의상, 조명에 남다른 미술적 감각을 구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아내 지지 장메르는 60대가 지나서까지도 고혹적인 춤으로 남편의 예술을 한편으로 이끌고 한편으로 뒷받침했으니 그야말로 프티의 뮤즈요, 창작력의 원천이었다.
프티의 작품 중 많은 경우는 사랑으로부터 절망적인 굴욕을 당했거나 육체적인 결함이 있는 주인공들의 사랑을 묘사하는 주제를 다루는데 그 예는 '시라노 드 베르주락' (1959)과 '노트르담 드 파리'(1965), '스페이드의 여왕'(1978), '클라비고'(1999)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기간에 걸쳐 있다. 또 오페레타가 원작인 '박쥐'(1979), 영화를 재창조한 '블루 엔젤'(1985)에서는 카바레 문화에 대한 프티의 독특한 관점이 잘 녹아 있다.
프티는 자신의 발레단을 이끌던 시절에도, 마르세이유 발레의 예술감독이던 시절에도 다른 발레단과 많은 작업을 했다. 그래서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마르세이유 발레를 떠난 다음에도 파리 오페라 발레, 라 스칼라 발레, 볼쇼이 발레 등 수많은 일류 발레단의 작품 제안을 받았다. 그래서 이전보다도 더 많은 작품이 리바이벌되고, 개정판이 나왔으며 2000년대 이후에 고령의 나이로 새로 만든 작품만도 10편에 달했다.
프티가 살아 있는 동안 너무 튀는 대중성 때문에, 또 높은 기품을 담은 것은 아니었기에 그를 진정한 대가로 취급하지 않은 평론가도 많았지만 프티가 청중을 매혹시킨 덕분에 발레의 저변이 크게 확대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또 아무리 생각해도 프티만큼 본능적인 감각이 살아 숨 쉰 존재는 찾을 수 없다.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안무가의 일원으로 꼽는 데 손색이 없는 것이다. 그가 이끌던 시절의 마르세이유 발레는 네 차례나 내한 공연을 펼쳤지만 정작 프티는 동행하지 못했다. 지난해 7월 국립발레단이 그의 작품 '아를르의 여인', '젊은이와 죽음', '카르멘'을 공연했을 때도 파리 오페라 발레의 스케줄과 겹쳐 오지 못했다. 그를 직접 볼 길은 없어졌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 작품으로 만날 기회를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