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현지 인터뷰] 名지휘자 바렌보임, 광복절에 베토벤 '합창' 지휘…
"남북한 모두에게 음악의 힘 보여줄 것"
지난 2005년 8월 요르단강 서안 라말라(팔레스타인 자치지구). 긴장이 흐르던 땅에 모차르트의 '오보에, 클라리넷, 바순, 호른을 위한 협주교향곡'과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이 흘러나왔다. 무장 군인들이 공연장을 에워싸고 있었지만 '감동'은 그 호위병의 울타리를 넘어 퍼져갔다. 세계적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Barenboim·69)이 창단한 서동시집(West―Eastern Divan) 오케스트라가 아니었으면 꿈도 꾸지 못할 세계적 이벤트였다.
유대인인 바렌보임은 '정치적' 지휘자다. 그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화합'을 꿈꾸며 팔레스타인 출신 학자 에드워드 사이드와 의기투합, 1999년 이집트·이란·이스라엘·요르단·레바논·팔레스타인·시리아 등 중동지역 다국적 연주자로 구성된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악장(樂長)도 이스라엘과 아랍 국적을 가진 두 명을 둬 서로에게 맞추는 경험을 하도록 했다. 이스라엘 강경파들은 그를 "반(反)유대주의자"라 비난했지만 그는 "사람들이 더 이상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할 뿐이다.
지난달 공연기획사 크레디아는 8월 10~14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연주회가 예정된 바렌보임에게 전화를 걸었다. "요즘 한반도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라말라에서 이뤘던 기적을 이곳에서 재현해볼 생각이 없는가." 바렌보임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뜻있는 아이디어다. 좋다." 예정되지 않은 추가 공연을 즉석에서 허락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이렇게 해서 바렌보임이 이끄는 서동시집 오케스트라가 오는 8월 15일, 광복절에 임진각 평화누리 야외 공연장에서 평화 콘서트를 연다. 연주곡은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노라. 그대의 부드러운 날개가 머무르는 곳에 백만인이여, 서로 포옹하라! 전 세계의 입맞춤을 받으라!'('합창'의 가사) 소프라노 조수미를 비롯, 메조소프라노 이아경·테너 박지민·베이스 함석헌도 함께 입을 맞춘다.
3일 오후(현지시각) 베를린 슈타츠카펠레 집무실에서 만난 바렌보임은 "이번 연주는 한국과 북한 모두에 들려주는 곡"이라며 "기회가 되면 북한에서도 공연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집무실 벽에는 "지금도 내 음악 안에서 살아 숨쉰다"는 선배 지휘자 푸르트벵글러의 초상, 팔레스타인 서안지구를 촬영한 사진 3~4장이 걸려 있었다.
1967년 제3차 중동전쟁(6일전쟁) 당시 마지막 민항기로 이스라엘에 입국해 매일 밤 텔아비브와 하이파에서 연주회를 열 정도로 '애국청년'이었던 바렌보임. 그가 팔레스타인 편에 서게 된 것은 전쟁에 이긴 이스라엘이 '박해받는 소수'에서 '핍박하는 다수'로 변했다고 판단하면서부터. "유대인은 스페인에서, 러시아에서 그리고 나치에게 학살당했습니다. 그런 민족이 관용을 베풀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한 나라가 섬으로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 나라의 존립을 위해서라도 이웃을 돌아보는 관용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바렌보임은 이런 관점으로 한반도의 분단을 보고 있다고 했다. "남의 일이 아니니까요. 하나여야 하는 나라가 이념이 달라 서로 싸우고 찢어지는 게 나는 몹시 마음이 아픕니다." 그는 "한국 역사를 잘 알진 못하지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싸움과 비슷한 것 같다"고 했다. "상대방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데서 반목이 생긴다"는 그는 "음악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무지를 깨고 서로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지난 5월에도 유럽 음악가 20여명과 함께 이스라엘이 공습을 퍼부은 가자지구에 들어가 모차르트 작품 두 곡을 연주했다. "무섭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그는 손을 휘저었다. "나는 지구 상에서 이스라엘 국적과 팔레스타인 명예시민권을 둘 다 가진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는 "음악은 사람을 하나로 묶어줄 뿐 아니라 상대의 영혼을 감동시키는 힘이 있다"고 했다. "만약 당신이 옆에 앉은 북한 사람에게 하루 종일 바이올린을 켜 준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래서 함께 악보를 보고 선율을 흥얼거리고 얘기를 나눈다면 불과 7시간 후에 당신은 그를, 그는 당신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게 될 겁니다. 그게 음악이에요."
☞서동시집 오케스트라
유대인으로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지휘자 바렌보임이 1991년 런던에서 팔레스타인 출신 영문학자 에드워드 사이드를 우연히 만나 "음악으로 두 민족의 평화와 화해에 나서자"고 의기투합해 만들어졌다. 단원은 주로 20세 안팎의 중동 각지 청년들이며, 오케스트라는 스페인 세비야에 있다. 악단 이름은 페르시아 상상여행을 다룬 괴테의 동명 시집 제목에서 따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