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트 탄생 200주년… 그는 왜
후대 피아니스트의 애증의 대상이 됐나
악보 달달 외워 연주… '암보'의 원조연주자들
바흐 푸가 암보 힘들자 양손 꼬기, 거꾸로 연주 등
기교 속출… 외울 필요 없는 전자악보 나왔지만
클래식 애호가 반발로 슬며시 사라져
악보를 외워서 연주하는 암보(暗譜)는 연주자들에게는 또 다른 고통이다. 짧으면 2분, 길면 40분도 훨씬 넘는 곡을 머릿속에 통째로 집어넣어야 한다. 높은음자리표·낮은음자리표가 오선(五線) 두 줄에 걸쳐 있는 피아노는 바이올린처럼 한 줄인 선율악기에 비해 외울 게 훨씬 많다.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1811~1886)는 '피아노 리사이틀(recital)의 창시자'이자 클라라 슈만과 함께 암보로 피아노를 친 첫 번째 연주자다. 피아니스트 김주영은 "자신감과 과시욕이 가득했던 리스트 덕분에 이후 피아니스트들은 성악가, 오케스트라, 무용수까지 등장하던 피아노 음악회 대신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하는 독주회를 열게 됐다"며 "암보가 미덕이라는 관념도 이때부터 전통으로 자리잡았다"고 했다.
◆암보의 고통
후대 연주자들에게 리스트는 암보라는 숙제를 안긴 '애증(愛憎)의 대상'이다. 19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리스트 탄생 200주년 기념 리사이틀을 연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연주회를 준비하며 "리스트가 암보를 해서 우리가 이렇게 고생하네"라고 농담했다고 한다. 몇몇 피아니스트들은 바흐의 푸가를 연습하면서 암보로 연주하기가 너무 까다로워 엉뚱한 방법을 고안해내기도 했다. 악보의 마지막 음부터 거슬러 올라가며 연주하기, 양손을 거꾸로 엇갈리게 해 연습하기, 피아노 의자를 치워버리고 쪼그려 앉아 치기 등이다. 피아니스트 김대진은 "'모든 게 리스트 때문이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며 웃었다.
◆나타났다 사라진 전자악보
2000년대 초반 국내에 등장한 '전자악보'는 연주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연주자들은 아이패드(iPad)와 비슷한 크기와 모양의 전자악보를 보면대에 올려놓고 연주했다. 디스플레이에 연결된 기기를 손가락이나 발로 툭 치면 악보의 장이 넘어간다. 외울 필요도, 손으로 책장을 넘길 이유도, 악보를 넘겨주는 페이지 터너(Page Turner)를 둘 필요도 없게 됐다. 지휘자 함신익을 시작으로 김대진·이대욱·강충모·신수정·이경숙 등 피아니스트들이 4~5년 전까지 사용했다.
그러나 클래식 애호가는 반발했다. 첫째, "전혀 클래식스럽지 않다"는 것. 전자악보는 디스플레이와 기기 본체를 유선(有線) 연결하는 시스템이라 눈에 거슬린다는 것이었다. "전자기기가 공연 감상을 방해한다"는 불평이 쏟아졌다.
둘째, 연주자의 진정성과 성실성을 의심하는 이도 있었다. "악보를 외워서 연주해야 제대로 준비한 것 같고 실력도 더 뛰어나 보인다"는 것. 러시아 출신 피아니스트 스비야토슬라브 리히터(1915~1997)는 "악보를 무조건 다 외우려는 것은 건강에 해로울 뿐만 아니라 허영심의 발로"라며 "하이든의 소나타를 암보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외워서 연주하느라 두 곡에 그치기보다는 악보를 보면서 20곡을 연주하는 편이 낫다"고 항변하기도 했다. 2000년 당시 디스플레이에 장착된 배터리가 2시간이 채 되지 않아 중간에 꺼질 염려가 있다는 점도 연주자들을 불안케 했다. 현재 전자악보는 무선(無線)으로 연주자의 연주를 듣고 컴퓨터가 알아서 악보를 넘기는 수준으로 진화했지만 애호가들의 '반감'까지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전자악보는 대부분 연습 중에만 쓰고 공연장에서는 거의 볼 수 없다. 김대진 교수는 "전자악보 사용은 취향의 차이에 불과하다. 음악 자체를 즐길 수 있다면 전자악보를 써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