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조재현
역시나 조재현은 바빴다. 오전에 연극 '민들레 바람되어' 공연 후에 이어진 '연극열전4' 라인업 회의를 끝내고 나서야 성사된 인터뷰였다. 하지만 지친 내색은 없었다. 질문에 답하는 데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조재현은 그렇게 언제나 진검승부 중이다
“15만 명이 다녀갔다. 중년 관객층이 늘었다.” 조재현은 연극 '민들레 바람되어'로 얻은 성과를 간단명료하게 요약했다. 연극열전2에서 발굴한 창작 연극이 거둔 기분 좋은 성과다. 2007년 겨울부터 일 년 동안 대학로를 떠들썩하게 했던 '연극열전2' 프로젝트의 마지막 작품으로 이 작품을 선택했을 때, ‘과연 이게 잘될까?’란 의심이 먼저 들었던 걸 생각하면 고무적인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창작 초연에 신인 작가의 작품이란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조재현이 망설임 없이 이 작품을 선택한 데는 확고한 이유가 있었다. “대학로가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선 창작 작품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새로운 작가에 대한 지원과 배려가 필요하단 말이다. 사실 '민들레 바람되어'는 연극열전 내부적으로도 호의적이지 않았던 작품이다(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하자고 했다. 희곡을 처음 읽었을 때 ‘촉’이 왔거든. 좋은 연출과 배우, 스태프를 꾸려서 다듬으면 분명 좋은 작품이 될 거란 믿음이 있었다. 그 믿음이 이렇게 흥행으로 이어진 것이고.” 지난 1월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장기 공연이지만 '민들레 바람되어'의 흥행은 식을 줄 모른다. 높은 객석 점유율에 하나 더 일궈낸 성과가 있다면 바로 중년 관객층의 발견이다.
주로 20대에서 30대까지 젊은 관객들로 이뤄진 대학로에 중년 관객들이 등장한 것. 공연 시작 한 시간 전부터 매표소에 중년 관객들이 길게 줄을 서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극장으로 가는 길에 아주머니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극장을 찾고 있더라고. 어디 가시느냐고 했더니, ‘어머! 저희 지금 조재현 씨 연극 보러 가는 길이에요!’ 하고 놀라는 거지. 그래서 직접 극장까지 안내해드렸다. '민들레 바람되어'가 이제 정말 자리를 잡고 있단 생각에 절로 기분이 좋아지더라.”
우리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 당신의 이야기
“오늘 우리 결혼사진을 봤다. 당신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데 나는 없더라. 나는 없고 나였던 사람만 있더라. 나는 이렇게 늙었는데 당신이 과연 나를 알아볼 수 있을까?” 죽은 아내의 무덤에 찾아간 남편의 고백은 이렇게 서글프기만 하다. ‘꽃’ 대신 ‘소주’ 한 병을 사 들고 죽은 아내를 찾아가는 남편의 모습에 눈물을 참는 건 힘든 일이다. '민들레 바람되어'의 공연장은 그래서 매번 눈물바다다.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조재현도 뜨거운 눈물이 끓어오르는 걸 참기 힘들다. 단순히 사별한 부부의 이야기가 전하는 슬픔만은 아니다.
'민들레 바람되어'는 안중기라는 인물을 통해 각자 다른 그림을 그리게 만든다. 겪지 않았어도 겪을 수 있는 이야기, 결국 자기 기억을 반영하는 연극인 것이다. “'민들레 바람되어'를 본 많은 사람들이 극을 보면서 한편으론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더라. 이 연극이 주는 힘이다. 그 이야기 자체에만 집요하게 몰입시키는 작품도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보는 내내 자기를 비유시킨다. 안중기라는 인물을 통해 나와 내 주변의 사람들을 돌아보는 거다.” 요즘 조재현은 사람들이 사인을 요청하면 “'민들레 바람되어'는 우리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 당신의 이야기입니다”라고 쓴다. 한 편의 연극이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감동의 실체를 경험한 덕분이다. 관객이 알려준 이 작품의 ‘참’의미다. “아내 손에 이끌려 억지로 끌려온 남성 관객들이 남몰래 눈물을 닦을 때, ‘그래, 이거구나. 이게 이 작품이 가진 힘이구나’라고 느낀다.
한편으론 왜 이렇게 연극이 줄 수 있는 감동을 잊고 있었을까 되돌아보기도 하고. 언젠가부터 연극적인 재미, 연극적인 장치에 길들여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대중이 연극을 찾는 이유는 연극적인 재미보다 작품 그 자체가 가진 감동 때문인 게 더 크다. 이 작품을 통해 잠재되어 있던 관객을 확보하고 감동을 줬다는 점에서 뿌듯함을 느낀다.”
무대 위에서도, 객석에서도 감동을 느낀다
연극열전 프로그래머로 생활한 지 벌써 5년째, 연극이 가진 힘을 믿기에 가능한 일이다. 단순히 무대 위에서 연기할 때만이 아니다. 무대 뒤에서 연극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바라보는 것, 객석에서 온전히 관객으로서 무대를 바라보는 것 모두가 조재현에게 감동 그 이상의 것을 전해준다. “얼마 전에 객석 맨 뒤에서 관객들을 유심히 지켜봤다. '민들레 바람되어'를 보고 눈물 흘리고 진심 어린 박수를 쳐주는 관객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편이 뭉클해지더라. 내가 무대에서 연기할 때뿐만 아니라 이젠 그 연기를 지켜보는 사람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함을 느끼는 거다.”
연극열전 프로그래머로 첫걸음마를 시작할 때 그는 이런 말을 했었다. “연극의 현실은 영화와 분명 다르다. 연극은 젖은 옷이 서서히 말라가는 과정처럼 보이지 않는 현실이다.” 하지만 5년이란 시간이 흐른 지금, 연극열전의 성과는 또렷한 현실의 성과로 드러났다. 대학로를 찾아오는 관객이 증가했고 다양한 기획 공연이 늘었다. “연극은 원시적인 매체이기 때문에 노력한 만큼 결과가 보인다”는 그의 지론이 확인된 셈이다. 물론 여전히 가야 할 길은 멀다. “연극열전을 통해서 연극을 봤다고 해서 다른 연극까지 찾아가진 않는 것 같다. 내가 항상 강조하는 게 피라미드식 작전인데(웃음). 한 사람이 좋은 연극을 보고 주변 사람들에게 연극을 소개하고, 또 그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방식으로….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더라. 그렇다고 포기하진 않는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부딪쳐야지.” 올 12월부터 새롭게 시작할 '연극열전4'에는 그의 이러한 고민이 고스란히 담길 것이다.
'민들레 바람되어'의 흥행에 힘입어 새로운 창작극을 발굴해 무대에 올릴 계획. 연극열전3에서 '에쿠우스'로 연출에 도전했다면 이번 '연극열전4'에선 작품 집필에 도전하겠단 각오다. “지금 마음속에 담아놓은 이야깃거리가 몇 개 있다. 작가 데뷔라고 하긴 좀 그렇고, 내가 생각해놓은 이야기를 발전시켜서 창작 작품을 준비하려 하고 있다.” 단순히 머리에서 나온 게 아니라 무대 안팎을 누비며 현장에서 얻은 아이디어들이다. 무대를 떠나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조재현이기에 가능한 도전일 것이다.
무의미하게 보내는 시간을 가장 경계한다
연극열전 프로그래머, 경기공연영상위원회 위원장, 경기도문화의전당 이사장까지 ‘배우 조재현’에게 붙는 수식어는 다양하다. 이걸 어떻게 다 하느냐며 사람들은 의아해하지만 막상 그에겐 굉장히 단순한 논리다. “이 모든 게 ‘연극’에서 시작한 일이다. 연극이 좋아서, 연극이 잘됐음 하는 바람에서 연극열전 프로그래머를 맡았고 그걸 계기로 지금까지 왔다. 다양한 포지션일 수는 있지만 결국 내가 바라는 건 똑같다. 무대가 전하는 행복, 그거 하나면 충분한 거지. 그래서 연극 출연에 더 집중하기도 했고.” 덕분에 조재현을 좀 더 많이, 가까이서 보고 싶은 팬들에겐 좀 매정한 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팬들의 아우성에 귀를 기울인 덕분일까. 올해에는 ‘배우 조재현’의 다양한 활동을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올해 초 촬영을 마친 영화 '전설의 검을 찾아서 : 더 킥'이 여름 개봉을 앞두고 있고, 드라마 '계백'에서 의자왕 역에 캐스팅됐기 때문. “'뉴하트' 이후에 너무 드라마를 안 하니까 사람들이 너무 섭섭해하더라고(웃음). 너무 연극만 했나 싶은 생각을 하던 차에 제안이 들어왔다. 보통 ‘의자왕’ 하면 너무 ‘삼천궁녀’만 연결시키더라고. 의자왕은 멸망하기 불과 5년 전만 해도 신라를 공격해 30여 성을 빼앗았을 정도로 전투적인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의자왕의 이미지를 전복시키고 강인한 면을 보여주고 싶다.” 지금도 충분히 바쁜데 이제 더 바빠지면 어떻게 하느냐는 걱정에 “나는 무의미하게 보내는 시간을 가장 경계한다”고 뼈 있는 한마디를 던진다. ‘나는 배우다’란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은 천생 배우의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