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리뷰] 차범석 작, 임영웅 연출 '산불'

입력 : 2011.06.07 03:04
한국연극 100년 역사상 베스트3로 꼽히는 '산불'(차범석 작·임영웅 연출)이 5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개막했다. '산불'은 6·25 전쟁으로 사내다운 사내는 다 잡혀간 산골에서 펼쳐지는 드라마다. 탈영한 빨치산 규복(조민기)을 점례(서은경)가 대밭에 숨겨주고 사월이(장영남)가 그를 공유하려 들면서 이야기는 애욕의 비극을 향해 타오른다. 이번 공연은 차범석 5주기를 맞아 신시컴퍼니가 제작했다. 1500석 대극장에서 26일까지 총 22회(3만3000석)나 공연할 만큼 사이즈가 큰 연극은 2000년대 들어 없었다.

연극‘산불’1막에서 과부 양씨(강부자·오른쪽)가“내 아들은 반동이 아니다”며 발끈하고 있다. 그의 옆이 며느리 점례(서은경). /뉴시스
연극‘산불’1막에서 과부 양씨(강부자·오른쪽)가“내 아들은 반동이 아니다”며 발끈하고 있다. 그의 옆이 며느리 점례(서은경). /뉴시스
[좋다!] 박돈규 기자

생생하게 포착해낸 욕망의 잿더미 - 강부자 등 배우 연기 인상적, 삶·죽음 응축된 엔딩도 좋아

고드름이 매달린 초가집, 집을 울타리처럼 껴안은 대밭, 삐뚤빼뚤한 산길, 그 너머로 솟은 봉우리…. 무대에는 1951년의 어느 산골이 얼어붙어 있다. 빨치산에게 시달리는 과부들의 춥고 궁핍한 겨울이 즉물적으로 돌진해온다. 암전(暗轉)마다 들려주는 피아노 연주와 구음(口音)은 정서를 증폭하는 장치로만 쓰였다. 희곡을 충실히 무대로 옮기는 데 집중했기 때문이다.

‘산불’은 사실주의의 대표작답게 배우들의 호흡과 대사, 움직임도 생활에 가까웠다. 과부 양씨(강부자)와 최씨(권복순)는 때론 정면 충돌하고 때론 물러서면서 힘의 역학관계를 그려냈다. 양씨의 며느리 점례, 최씨의 딸 사월이도 똑같이 남편을 잃었지만 입장은 판이하다. 점례는 마을에 남으려 하고 사월이는 떠나 재가(再嫁)하려 한다. 끌어안으려는 곡선과 파괴하려는 직선의 어울림이다.

이 연극은 “설 지난 무, 서른 지난 계집” 같은 대사와 다양한 인물을 통해 전쟁 속에도 사랑·꿈·집착·질투·웃음이 있다는 것을 역설했다. 바보 귀덕이나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노인에게도 삶은 요동쳤다. 1막에서 규복의 존재를 안 사월이가 “점례에게 소중한 남자는 내게도 소중해” “하루씩 번갈아 가면서 만나자”고 할 때 객석엔 웃음이 흥건했다.

2막은 꽃피는 봄, 마을에는 국군이 들어왔다. 그러나 점례와 사월이에게는 더한 절망이 덮쳤다. 사월이 바라지 않던 임신을 하고, 국군은 규복이 은신한 대밭에 불을 지른 것이다. 벌겋게 불길이 번지고 대밭에서 총성이 울렸다. 포그머신이 뿜어대는 연기에 초가집도 사람도 뿌옇게 지워져 갔다.

강부자는 역시 억센 과부에 적역이었다. 4년 전 ‘산불’과 비교하면 권복순이 더 잘 보여 균형감이 살아났다. 서은경·장영남은 감정 진폭이 큰 배역을 견뎠고, 특히 장영남의 사월이가 숨 쉴 틈을 줬다. 노인 역의 이인철도 희극적 타이밍이 좋았다.

새로운 시도는 애초부터 목표가 아니었다. 욕망의 잿더미를 포착해 관객과 나눌 뿐이다. 마지막에는 점례의 망연자실, 자살한 사월이를 향한 통곡, “저녁은 멀었느냐?”는 노인의 호통이 겹쳐졌다. 삶과 죽음이 한 덩어리로 응축된 엔딩이었다.


[글쎄?] 이수진·공연칼럼니스트

이도 저도 아닌 채 길 잃은 연극 - 모던함과 리얼리즘 사이 새로운 시도 없어 아쉬워


막이 열리기 직전, 어둠 속에서 피아노 반주와 높은 가성의 여성 보컬이 울려 퍼지자 임영웅 연출의 이번 ‘산불’은 뭔가 새롭겠구나 싶은 기대가 들었다. 하지만 막이 오르자 희곡에 지시된 그대로의 지지리 낡은 초가와 대나무 숲과 갑갑하게 무대를 둘러싼 산이 펼쳐진다. 마음의 통곡과도 같은 보컬과 피아노를 빼면 새로운 시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보컬이 보여주는 모던함 쪽이든 그 자체로 눈물 쏙 빠지는 절절한 리얼리즘이든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했지만 이도 저도 아닌 채로 연극은 흘러간다.

‘산불’은 마치 초연 시절의 프로덕션이 바로 저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다. 그때나 지금이나 6·25는 진행형이다. 하지만 차범석은 총알이 오고 가는 스펙터클이 아니라 결과로서의 비극으로 전쟁을 펼쳐보여준다. 텍스트만으로도 감칠맛 나는 대사들이 넘쳐난다. 그리고 그 대사 안에서 전쟁의 불씨에도 타지 않는 인간 본연의 욕망이 죽순처럼 쑥쑥 올라온다. 하지만 묘하게도 정석으로 간 이번 ‘산불’에서는 전쟁도 욕망도 어쩐지 사소해 보인다. 무대는 대나무를 통으로 꼭대기까지 노출해버림으로써 대나무숲이 주는 아찔함과 은밀함이 사라져버렸고, 배우들의 연기는 주고받기보다는 허공으로 흩어져 버린다. 사월이 역의 장영남이 절망 끝의 아찔한 매력을 보여주고 조민기가 굶주린 여성들의 도덕심을 한 번에 날릴 정도의 섹시함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귀덕이나 노망 난 할아버지는 너무 과장되어 그 배역이 주는 애잔함이 오히려 사그라진다.

마지막 장면, 온 산을 다 태우는 산불이 났는데도 배우들이 서 있는 공간만은 아무 일도 없으리라는 듯 태연하다. 그들의 모습이 마치 이 프로덕션의 현주소인 듯싶다. 산불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불이 마음에서 질러진 것이면 더욱 그러하지 않을까. 초연 이후 50년이 지난 작품이라면 한 번 불을 지르고 새로운 싹(해석)을 틔워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차범석의 산불은 그럴 만하다. 사그라지지 않을 불씨를 오늘도 여전히 활활 태우는 멋진 작품이므로.

☞ 故 차범석 선생 5주기 기념 연극 '산불' 초대 이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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