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 임평용
지휘자 임평용이 지난 1월 성남시립교향악단의 제3대 상임지휘자 겸 음악감독으로 취임했다. KBS 국악관현악단과 서울시 국악관현악단의 상임지휘자를 거친 임평용은 국악과 양악을 모두 섭렵한,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보기 드문 이색 경력의 지휘자다. 성남시향과 함께 새로운 ‘하이브리드 사운드’의 창조를 꿈꾸는 임평용이 전하는 악단의 미래를 들어보았다.
임평용의 발자취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하이브리드(hybrid)'다. 서울예고에서 피아노를, 서울대학교에서 국악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에서 작곡과 오케스트라 지휘를 전공한 임평용은 대학 시절 동아콩쿠르에서 국악과 서양음악 작곡 부문에 모두 입상한 재주꾼이었다. 이런 ‘크로스오버’의 이력은 이후 국악과 양악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밑거름이 된다.
“한쪽 음악만 접했다면 지금보다는 편협적이었겠죠. 국악이나 양악으로 한정 짓는 대신 ‘음악’ 지휘자로 살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큰 도움이 되더군요. 상대의 분야에 대해 불편한 거리를 지니지 않고, 그저 음악이라는 큰 틀 안에서 이상적인 소리를 고민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좋죠.”
김자경 오페라단과 광주시향 상임지휘자, KBS 국악관현악단 상임지휘자, 서울시 국악관현악단 단장을 역임한 임평용은 1990년 서울로얄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창단해 클래식과 국악의 접목에 힘썼고, 목원대학교 음악대학 학장으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지난 1월, 김봉의 뒤를 이어 성남시립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 취임한 임평용은 성남시향의 성장을 위한 청사진으로 먼저 ‘새로운 사운드의 창조’를 꼽았다.
올해로 창단 8주년을 맞은 성남시향은 앞으로 만들어갈 미래가 더욱 많은 오케스트라다. 좋은 오케스트라의 육성이란 긴 세월에 걸쳐 무성한 숲을 가꾸는 것과 비슷할 터, 나무 몇 그루를 심고 조급한 성장을 다그칠 수는 없다. 기본적인 실력 향상 외에도 행정적인 지원과 장기적인 안목의 기다림은 필수다.
“대편성 작품까지 연습할 수 있는 전용 연습실이 없는 지금의 환경에서는 정밀한 소리를 만드는 데 한계가 있고, 레퍼토리 선정에도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새롭게 연습실을 지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성남시향의 연주 무대인 성남아트센터 콘서트홀을 오전 시간에 적극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고려해준다면 참 좋겠죠. 제대로 된 편성의 연주회 횟수도 연간 최소 60회 이상이어야 합니다. 연주 기회가 많아질수록 단원들의 기량 향상은 물론, 성남의 이름을 더 많이 알릴 수가 있습니다. 수석과 차석 단원 선임 등 인원에 대한 탄력적인 조율, 우수한 해외 오케스트라 단원의 객원 초빙도 악단의 소리 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부분인데 지금으로선 쉽지 않아요.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지휘자가 원하는 시스템이 탄력적으로 조율되어야 하는데 그런 점이 안타깝죠.”
임평용이 이끌어갈 성남시향은 어떤 색깔일까? 우선 2011년은 말러나 브람스 사이클처럼 한 작곡가를 집중 탐구하는 대신, 다양한 시대의 작품들을 폭넓게 섭렵하며 기량을 다질 예정이다. 지난 2월 정기 연주회에서 글라주노프의 교향곡 7번을 초연하며 새 수장과의 산뜻한 출발을 알린 성남시향의 프로그램은 브람스(3월)와 베토벤(5월), 차이콥스키로 이어진다.
“글라주노프는 금관이 강조된 색다른 느낌의 곡이라 새 출발에 적절한 신선한 선곡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다음으로는 음악적으로 정련된 사운드를 빚어내기 위해 브람스 교향곡 4번을 선택했어요. 오케스트라가 필요로 하는 정밀한 소리를 만들어내고 그걸 단원들도 느껴야 하니까요. 베토벤은 집약적인 사운드를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고, 이후 차이콥스키의 4번으로 이어집니다. 마니아들은 근대 이후의 작품들도 관심이 많기 때문에 이 역시 등한시할 수 없죠. 특정 작곡가의 전곡 연주 작업보다는 우선 폭넓은 레퍼토리를 통해 소리를 정련하고 성남시향의 색깔을 제대로 만들어나가는 것이 우선입니다. 유행에 따라 단순히 말러나 브람스 사이클을 진행한다면 ‘우리도 이런 거 한다’ 정도의 의미밖에 없기 때문이죠.”
임평용은 그동안 불가리아의 소피아 국립교향악단을 비롯해 폴란드와 체코, 오스트리아 등 유럽의 여러 주요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공고한 유대 관계를 맺어왔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오케스트라’의 사운드는 무엇일까.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란 결국 누가 지휘해도 일관된 소리를 들려주는 악단입니다. 베를린 필이나 빈 필 같은 전통의 악단도 물론 뛰어나지만, 체코의 브루노 필이나 불가리아의 소피아 필하모닉 같은 동구권 오케스트라도 대단히 훌륭한 사운드를 지니고 있죠. 소피아 필의 경우 공산주의가 붕괴된 뒤 우수한 연주자가 많이 빠져나가긴 했지만, 기본적인 색깔이 제대로 정돈된 오케스트라거든요. 우리는 아직 그런 부분이 아쉽죠. 한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만들어나가기란 정말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작업입니다. 제대로 정리된 현 파트, 우수한 솔리스트를 갖춘 목관, 색깔이 분명한 금관, 외부의 우수한 객원 단원 영입…. 모든 부분이 잘 갖춰지고 제대로 어우러져야 하는데, 단시간엔 결코 쉽지 않죠. 우리보다 기본적인 수준이 높은 일본 오케스트라들 역시 해외 유명 지휘자를 여럿 영입하면서도 쉽게 해결하지 못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동시대의 새로운 음악을 꿈꾸다
지휘자 이전에 작곡가로서 여러 작품을 남긴 임평용은 동시대 음악에도 관심이 많다. 특히 국내외의 뛰어난 작곡가에게 작품을 위촉하는 작업은 그가 지속적으로 염두에 둔 부분이다.
“서양음악사란 결국 작곡가의 역사입니다. 음악사에 이름을 남긴 굵직한 작곡가의 작품 목록을 살펴봤을 때, 그중 ‘작품 ○○, 한국의 성남시향 초연’이란 기록을 남길 수 있다면 정말 큰 의미가 되죠. 올해는 보은의 달 6월을 맞아 안성혁 작곡가에게 과거 성남 지역의 의병 거사를 소재로 한 곡을 위촉한 상태입니다. 아직은 혼자만의 구상이긴 하지만 중국 작곡가에게 남한산성과 관련된 곡을 위촉하고 싶기도 해요. 우리 역사와 민요, 동양의 악기를 함께 조합한 작품이 탄생한다면, 과거의 아픔을 딛고 아시아의 평화에 기여하는 의미 있는 작업이 되지 않을까요?”
지역 특색을 담아 세계화를 이루는 프로젝트에 앞서, 성남을 위한 시민친화형 오케스트라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최근 성남시는 저소득층 청소년을 위한 예술 활동 지원 방안 회의를 열고, 예술에 재능을 지닌 문화 소외 계층의 아이들이 악기 연주 등 다양한 예술교육과 재능 나눔을 받을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임평용과 성남시향 역시 힘을 보탤 예정이다.
“클래식은 부유층의 전유물이라는 선입견을 없애고 소외 계층에게도 균등한 교육 기회를 부여해야 합니다. 단순히 동네 오케스트라를 구성하는 정서 함양만으론 부족해요. 기초적인 트레이닝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져야 근본적인 발전이 이루어지죠. 제대로 된 바탕이 갖춰져야 성남에서도 제2의 구스타보 두다멜이 탄생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클래식이라는 단단한 성벽만 고수하기보다는 많은 시민이 감동받고 즐겁게 감상할 수 있는,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프로그램 개발에도 노력을 기울이려 합니다. 어느 소수만을 위한 예술이 아닌 모두와 공감할 수 있는 오케스트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작업입니다. 감동 없는 음악을 한다면 오케스트라의 존재 의미도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