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캘리그래피… 서예야? 그림이야? 둘 다야!

입력 : 2011.05.06 14:59

그림과 서예의 벽 허문 그 곳, 들여다보니
소주 '처음처럼' '참이슬', 영화·드라마·책·식품 제목…
캘리그래피 쓰는 곳 늘어… 日·中에 비해 인지도 낮아

지난달 21일 서울 가회동 가회갤러리에서 개막한 캘리그래퍼(calligrapher·글씨예술가) 강병인의 개인전에는 300여 명의 인파가 몰려 갤러리 내부에 들어가기 힘들 정도였다. 작년 초 미국 뉴욕에서 먼저 개인전을 연 강병인의 첫 국내 개인전인 데다가 '봄'과 '꽃' 두 글자를 위주로 봄의 정취를 형상화한 그의 작품들이 '봄날 오후, 글꽃 하나 피었네'라는 전시 제목과 잘 어울려 '흥행'에 성공했다. 전시된 작품 40여점 가운데 지금까지 판매된 작품 중 최고가는 300만원선. 22일까지 계속되는 이 전시회는 개막 2주를 맞은 5일 현재 관객 1000명을 돌파했다.

손글씨에 디자인을 입혀 회화와 서예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캘리그래피(call igraphy) 작품이 한국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가 쓴 글씨 '처음처럼'을 소주회사가 상표로 쓰면서 1억원의 장학금을 낸 일이 국내에서 캘리그래피를 널리 알린 '사건'이었다. 애플의 CEO 스티브 잡스가 대학에서 전공 공부를 포기한 뒤 캘리그래피를 흥미롭게 청강했던 것이 훗날 매킨토시 컴퓨터 서체를 만들 때 큰 도움이 됐다는 이야기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캘리그래피는 아직 국내에서 예술 장르로서 후한 대접을 받지는 못하고 있다.

‘봄’자와 ‘꽃’자로 각각 생동하는 봄의 역동성을 표현한 강병인의 캘리그래피 / 캘리그래퍼 강병인 제공
‘봄’자와 ‘꽃’자로 각각 생동하는 봄의 역동성을 표현한 강병인의 캘리그래피 / 캘리그래퍼 강병인 제공
불과 15년 전인 1996년 캘리그래피에 대한 무지(無知)를 입증하는 사건 두 개가 벌어졌었다. 그 해 개봉한 임권택 감독 영화 '축제'는 포스터에 쓰인 영화 제목을 캘리그래퍼 여태명의 작품에서 무단으로 집자(集字)해 썼다. 또 그 해 시작한 부산국제영화제 역시 영화제 로고를 여태명 작품에서 허락 없이 갖다 썼다. 두 곳 모두 당시로는 큰돈인 2000만원의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캘리그래피는 글씨만을 다룬다는 점에서 서예와 닮았고, 글씨를 자유자재로 해체하거나 추상화해 이미지를 만든다는 점에서 회화에 근접해 있다. 일본과 중국은 각종 현판과 간판은 물론 제품 상표에도 캘리그래피를 적용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서양의 경우 손글씨 작품을 서체화(書體化)한 것도 캘리그래피 영역에 포함시키지만 동양에서는 폰트(font), 즉 서체로 만들어진 손글씨는 캘리그래피에서 제외한다.

2007년 설립된 한국캘리그래피디자인협회(회장 여태명 원광대 교수)에 현재 소속된 캘리그래퍼는 총 130명가량. 이 가운데 여성이 60%로 남성보다 많은 편이다. 캘리그래피 과정을 가르치는 대학은 원광대·경기대·대전대·대구예술대·계명대 정도로 아직 적은 편이다.

아파트 이름에 쓰인 여태명의 캘리그래피 ‘수목토’ / 캘리그래퍼 여태명 제공
아파트 이름에 쓰인 여태명의 캘리그래피 ‘수목토’ / 캘리그래퍼 여태명 제공
캘리그래피를 창작하는 도구는 그야말로 무한하다. 각종 크기와 질감의 붓은 물론 나뭇가지, 갈대, 수세미, 칫솔, 솔방울, 나무젓가락, 동아줄, 빗자루, 칡뿌리, 대나무, 이쑤시개, 솜뭉치 등 작가가 상상하는 글씨의 느낌을 표현할 수 있는 도구면 무엇이든 가능하다. 여태명 교수는 "캘리그래피는 글씨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의 표정을 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글씨로 '사랑'을 표현하거나 '바위'를 표현하는 것은 그 질감이나 느낌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서체로는 불가능하다"며 "이를테면 소낙비와 가랑비의 각각 다른 느낌을 글씨로 담아내는 작업이 캘리그래피"라고 말했다.

캘리그래피 작가들은 순수 예술과 상업 캘리그래피를 동시에 창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요즘 대부분의 영화·드라마 타이틀, 책 표지 글씨, 식품 포장지 글씨들이 이런 캘리그래퍼들에 의해 창작되고 있다. 이들의 손글씨에 대한 대가는 아직 높지 않은 편이다. 강병인 작가가 쓴 소주 상표 '참이슬'의 경우도 팔리는 양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대접을 받았다. 여태명 교수는 "아직도 캘리그래피에 대한 기업 CEO나 단체장들의 인식이 낮아 캘리그래피를 전체 디자인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며 "협회 차원에서 이런 인식을 바꾸기 위한 세미나와 워크숍을 계속 열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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