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의 클론이기를 거부하다

입력 : 2011.06.13 10:32

피아니스트 폴 루이스

영국 출신의 피아니스트 폴 루이스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부분은 바로 거장 알프레드 브렌델의 애제자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브렌델의 후광과는 별개로, 루이스는 온전히 자신만의 진중하고 학구적인 연주로 굳건한 음악 세계를 구축해왔다. 4월 23일 성남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첫 내한 리사이틀에서 루이스는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15번 D840과 17번 D850, '3개의 소품, D946'을 들려줄 예정이다. 온전히 슈베르트로 꾸민 월드 투어 프로그램의 첫 시작이기도 하다.

리버풀

아무래도 리버풀에는 음악적 영기가 흐르나보다. 예술적으로 그리 특출할 것 없는 이 영국 북부의 조그만 도시가 자신이 배출한 뮤지션 덕분에 문화도시로 명성을 날리고 있다. 시작은 비틀스였다. 그들의 팝음악 레코딩이 클래식보다 우위를 점하며 전설이 될 즈음 사이먼 래틀이 등장해 세계 최고의 관현악단인 베를린 필의 최연소 상임 지휘자로 등극했다.

사이먼 래틀이 일개 지방 악단에 불과하던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을 세계적인 일류 오케스트라로 키우고 있을 무렵 리버풀은 도시를 빛낼 다음 타자로 폴 루이스라는 피아니스트를 준비하고 있었다. 음악적으로 따질 때, 폴의 출생 환경은 다소 열악했다. 아버지는 부두에서, 어머니는 시청에서 일하는 노동자 출신이었다. 폴이 네 살 때 큰고모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장난감 피아노를 사주었는데, 이것이 어린 시절 집에서 접한 유일한 악기였다.

그는 공립학교에 입학하면서 학교에서 악기를 배울 수 있게 되었다. 배우고 싶었던 건 피아노였지만 학교에는 피아노 교사가 없었기 때문에 그는 차선으로 첼로를 잡았다. 스스로 첼로에 소질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유감이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음악을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의 인연 때문인지 그는 훗날 노르웨이 출신의 여성 첼리스트를 아내로 삼았다.

“어떻게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했는지 도통 생각나지 않습니다. 다만 어린 시절 음반 라이브러리에 있던 방대한 고전음악 음반에 압도되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또 부모님이 가끔씩 리버풀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콘서트에 데리고 가주셨지요."

폴이 여덟 살 때,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대신해 동네에 있는 음반 라이브러리 회원으로 가입했다. 매주 토요일마다 폴은 어머니와 함께 클래식 음반을 석 장씩 대여해 녹음을 하고 반납했다. 그렇게 매주 석 장씩 반복해서 대출해가는 이 모자母子를 당시 도서관 직원은 무척 흥미롭게 지켜봤다. 음반은 폴의 음악적 욕구를 더욱 자극했다. 점심시간이면 나가서 뛰노는 대신 음악실에 몰래 기어들어가 피아노를 뚱땅거렸다. 이때의 ‘혼자 놀기’가 2년 뒤 처음 레슨을 받을 때 큰 도움이 되었다. “적어도 어떤 건반을 두드리면 어떤 소리가 나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까요.”

폴의 나이가 두 자리에 들어설 때까지도 본격적인 음악교육은 여전히 요원했다. 말보다 피아노를 먼저 배울 만큼 유아 시절의 교육이 중시되는 음악계에서 이런 성장 과정은 매우 희귀한 사례다. 그러던 어느 날 온 가족이 모여 앉아 TV를 시청하던 중 화면 너머의 건물이 왠지 낯익었다. 집 근처의 체담 음악원이었다. 일단 오디션을 보기로 했지만 폴이나 부모 모두 열두 살이나 된 아이를 뽑아주지 않을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당연히 떨어졌죠. 시험관 앞에서 연주를 하면서 그렇게 절망해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열정은 있었지만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어요.”

하지만 서툰 피아노 솜씨 위로 잠시나마 반짝이던 폴의 열정을 감지한 시험관이 최소한 한 명은 있었다. 그는 폴의 개인 교습을 자청했다. 그로부터 2년 뒤, 폴은 다시 오디션을 보았고 이번에는 합격했다. 당시 그가 친 레퍼토리는 고도의 기교를 뽐내는 발라키레프의 ‘이슬라메이’와 리스트의 ‘메피스토 왈츠’였다. 시험관들도 놀랐지만 가장 놀랐던 건 폴 루이스 자신이었다. “예전에는 엄두도 못 냈던 작품들을 내 손가락이 연주해내는 모습을 보니 흥분할 수밖에요. 이때만 해도 전문 연주가가 되겠다고 구체적인 목표를 세운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결국 그렇게 굴러가더군요.”

체담 음악원에서 그의 스승은 러시아 음악 스페셜리스트였다. 러시아 레퍼토리 위주로 교육을 받은 뒤 폴은 런던의 길드홀 음악원에 입학했다. 전혀 다른 전통과 문화를 가진 길드홀에서 그는 다시 기초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좋은 일도 있었다. 여기서 비로소 폴은 자신이 모차르트와 베토벤, 슈베르트 등 독일 레퍼토리에 더 많은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생겼다. 알프레드 브렌델의 마스터클래스에 참석하게 된 것이다.

런던

“브렌델 앞에서 저는 완전히 신경이 곤두서 있었습니다. 피아노를 포기하고 딴 길을 찾아보라고 할까봐 겁이 났었죠. 다행히 그는 내 연주에 대해 그리 많은 말을 하지 않았어요. 마스터클래스를 마친 뒤 단체 사진을 찍으려고 모두 한자리에 모였을 때 갑자기 그가 ‘몇 살이냐?’고 물었습니다. 스무 살이라고 대답했죠. 며칠 뒤 브렌델은 앞으로도 계속 연락하고 지내자는 이메일을 보내왔습니다. 그의 앞에서 저는 리스트의 단테 소나타를 연주했습니다. 꽤 오랫동안 쳐왔던 작품이라 나름대로 자신 있게 선택한 곡이었는데, 그 자리에서 무려 네 시간 동안 내 연주를 지적하고 손봐주시더군요.”

“잘 쓰면 약, 못 쓰면 독”이라는 속담이 있다. 폴 루이스에게 브렌델은 딱 약이자 독과 같은 이름이다. 브렌델과의 인연이 없었다면 분명 그는 지금과 같은 주목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제자를 거의 두지 않는 외골수로 소문난 이 노익장이 모처럼 눈여겨본 루이스를 런던의 음악계는 가만 놔두지 않았다. 그가 연주를 할 때면 객석은 일반 청중만큼이나 피아니스트들로 가득했다. 모두가 '브렌델의 소년 Brendel’s boy’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브렌델’의 약발은 처음에는 썩 괜찮았다. 또래 피아니스트들이 기회를 잡기 위해 끝없이 콩쿠르에 참가하는 동안 폴 루이스는 몇 번 안 되는 대회 입상 경력만으로 전문 연주가로서 안정된 자리를 확보했다. 1994년 런던 세계 피아노 콩쿠르에서 2위에 입상하자마자 위그모어홀 주요 연주자로 위촉되었으며, 2000년에는 영국 왕립 음악원의 교수로 채용되었다. 하지만 그 약발은 결국 넘쳐서 독이 되었다. 2002년 슈베르트 후기 소나타를 담은 그의 데뷔 음반은 꽤 괜찮은 판매고에도 불구하고 ‘브렌델의 복제판’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사실 브렌델의 가르침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브렌델은 참 피아니스트답지 않은 피아니스트예요. 피아노 악보를 오케스트라 악보처럼 들여다보죠. 음표를 저마다 다른 악기로 연주하는 양 음색과 텍스처를 다르게 해석했어요. 그는 해석은 전적으로 연주자의 개성에 달려 있다고 보았습니다. 한 가지 해석만이 타당한 게 아니라는, 자율성을 내게 심어주었죠.”

이런 브렌델의 가르침은 피아노라는 악기의 일관된 음색과 선율에만 의존했던 폴 루이스에게 폭탄 같은 발언이었다. 스승의 충고를 실전에 응용하고자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더 이상 음표가 예전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후 몇 달이 지나서야 그는 자신만의 관점에서 악보를 해석하는 능력을 습득했다고 고백한다. 그렇게 녹음한 첫 음반이 여전히 브렌델의 그림자에 가려 있는 것을 보며 폴 루이스는 상당히 오랫동안 고전했다. 안타깝게도 스승과 제자는 성향도 음악적 취향도 비슷했다.

중견 연주가도 고민해가며 선택하는 슈베르트의 후기 소나타를 대뜸 데뷔 음반으로 선곡하고, 이어 베토벤 소나타 전곡 사이클을 개시할 만큼 루이스 또한 브렌델만큼이나 모차르트와 베토벤, 슈베르트로 이어지는 독일 레퍼토리에 애착이 많았다(브렌델은 베토벤 소나타 전집을 무려 세 번이나 다시 녹음했다). 브렌델은 자신의 커리어를 장기적으로 계획하고 꼼꼼하게 수행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루이스도 2005년 베토벤 사이클을 시작해 무사히 전집을 완성했고, 지난해 슈베르트 사이클에 재돌입하며 음반사에 통지한 자신의 장기 계획을 빈틈없이 소화하고 있다.

루이스는 브렌델과의 레슨을 그만두었다. 온전한 자신만의 베토벤을 완성해야 한다는 강박이 그를 압도했다. 그런 행보와 더불어 폴 루이스의 이름이 브렌델과 함께 거론되는 횟수도 차츰 줄어들었다. 음악 전문지 '그라모폰'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브렌델’이라는 이름이 가져다준 압박에 대해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토로했다. 몇 년에 걸쳐 완성된 그의 베토벤 사이클을 두고 이제는 어느 누구도 브렌델과 비교하지 않는다. 유튜브에서는 베토벤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열정적으로 설명하는 루이스의 영상을 발견할 수 있다. 제자의 공연에 브렌델이 청중으로 얼굴을 내미는 것을 제외한다면, 루이스의 홀로 서기는 이제 어느 정도 성공한 듯싶다.

그리고 서울

현재 폴 루이스는 협연을 포함해 연간 130회가 넘는 공연을 소화하는, 세계에서 가장 바쁜 연주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대략 사흘에 한 번꼴로 공연을 하는 셈이다. 지금까지 한국인을 포함해 한국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었다는 폴 루이스는 첫 번째 내한 공연을 앞두고 마음이 설렌다. “아무런 선입견이나 기대 없이 있는 그대로 한국을 경험하고 싶습니다.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고 새로운 문화를 경험하는 것은 늘 즐거운 일이니까요.”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