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도 수다로 푼 아줌마들- 연극 ‘이웃집 쌀통’

입력 : 2011.04.15 17:11



골목길 코믹 호러…유쾌·살벌한 상황 속 깊은 여운

[이브닝신문/OSEN=오현주 기자] 서민들이 모여 사는 서울 어느 동네 다정연립 앞 골목. 멀리 공사장 기계음이 울리고 귀퉁이마다 쓰레기봉투가 쌓여 있다. 여느 골목길에서 볼 수 있는 이 풍경을 깨는 것은 한 명씩 모습을 드러낸 네 명의 ‘아줌마’. 순식간에 공사장 소음을 덮을 목소리를 뽑아내며 저마다의 수다를 꺼내놓는다. 그런데 불현듯 그들의 눈에 못 보던 물건이 들어온다. 쌀통이다. 범상치 않은 이 쌀통의 등장으로 네 여인들의 일상은 순식간에 위기로 들어선다. 오싹한 웃음을 내건 연극 ‘이웃집 쌀통’이다.
 
한바탕 시끌벅적한 말다툼이 골목길을 울린다. 이웃인 네 명의 여인들은 여전히 시끄럽다. 화제는 쓰레기와 퀴즈대회. 그런데 오늘은 여느 때와 좀 다르다. 쌀통 때문이다. 남의 집 대문 옆에 덩그러니 놓인 빨간 고무쌀통엔 묵은 쌀이 한 가득이다. 쌀통이 화두가 된 이들의 새로운 언쟁은 ‘누가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느냐’는 도덕관념 부재를 탓하는 단계에서 이내 ‘그러니 나라꼴이 이 모양이다’라는 위태로운 국가관에 대한 우려로까지 번져나간다.

여기까지는 단순하다. 문제는 쌀통 안에 있다. 떡을 해먹기로 어렵게 결정하고 쏟아낸 묵은 쌀 속에서 어린아이의 말라비틀어진 손가락과 함께 비닐봉투에 꽁꽁 싸인 1천만원 지폐뭉치가 따라 나온 거다. ‘골목길 코믹 호러’를 표방하는 작품이 그 선언대로 반전의 대전환을 이루는 순간이다.

그 사이사이 실체를 내보이지 않는 고양이 울음소리도 간혹 들리고 어디서 울려나오는지 알 수 없는 오르골의 멜로디도 퍼진다. 꺼졌다 켜졌다 반복하는 조명은 언제 공포를 느껴야 하는지를 친절히 알려주며 긴장의 강도를 조정한다. 사건을 묻고 눈먼 돈을 나누기로 결정한 네 여인은 나중엔 중국집 배달원이 들고 다니는 그릇 수거함에도 놀라 뒤로 넘어지는 상황에 이른다.

있을 법한 이야기로 일상에서 느끼는 공포감의 정점을 포착하고자 하는 데 작품의 목적이 있다. 그런데 섬뜩한 이 사건을 풀어나가는 방식은 희극이다. 네 여인들이 이 엄청난 범죄를 신고 못하는 이유도 명확하다. ‘집값이 떨어질까 봐’다. 사실 손가락이 발견됐을 뿐 살인사건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네 여배우들의 앙상블이 돋보인다. 어디까지 연기이고 어디까지 사실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입담이 백미다. 이들이 쏟아내는 밀고 당기는 수다를 한참 듣다보면 이미 사건에 깊숙이 개입해 있다. 추측과 낭설로 온 동네 사람들을 사건 용의자로 지목해가는, 추리의 논쟁으로 격상된 수다의 향연에 덩달아 빠지는 것도 재미있다.

범인이 결국 밝혀졌는지, 돈을 나눠가진 네 여인들은 끝까지 발각되지 않았는지, 작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지난해 신춘문예 단만극제에서 ‘그녀들만 아는 공소시효’란 제목으로 첫 선을 보여 화제가 됐다. 서울 대학로문화공간 이다 2관에서 내달 15일까지 볼 수 있다.

euanoh@ieve.kr /osenlife@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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