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평론가 박종호
“오페라 해설이란 음악뿐만 아니라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다. 결국 오페라란 인간이 스스로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박종호가 들려준 이야기다. 시공을 초월해 어느 사회에나 적용할 수 있는 보편성과 시의성은 그가 언제나 강조하는, 공연예술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미덕 중 하나다.
“오늘날에도 옛 작품인 오페라를 통해 감동을 얻을 수 있는 이유가 여기서 비롯되지요. 예를 들어 '라 트라비아타'는 단순히 술집 아가씨를 사귀다 버린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주인공 비올레타와 같은 소수 약자들이 기득권층으로 진입할 수 없는 굳건한 장벽이 존재한다는 점, 사회적 구조가 그녀들을 희생시켰다는 점은 오늘날에도 동일하거든요. 베트남이나 연변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수많은 여성 중 남자 집안의 반대를 받거나, 혼인신고도 없이 사는 이들 또한 언제든 비올레타처럼 버려질 수 있는 상황인 거죠. 예나 지금이나 사회적 약자는 세상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점을 이 작품을 통해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나비부인' 역시 그저 나가사키에서 일어난 일본인과 미국인 남녀의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우리 주변에서 늘 벌어지는 이야기죠. 그래서 오페라 해설도 단순히 줄거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글라스를 통해 ‘자세히 들여다보는’ 겁니다. 줄거리가 궁금하면 책만 찾아봐도 되거든요. 오페라 속에 어떤 이야기가 있는지, 우리네 삶을 들여다보듯 풀어내야죠.”
오페라글라스, 삶을 엿보다
박종호는 이달부터 12월까지 성남아트센터에서 '박종호의 오페라글라스' 시리즈로 관객을 만난다. 박종호의 친근한 해설과 실력파 성악가들의 실연, 다채로운 영상물이 어우러진 이 프로그램은 매달 하나의 작품을 집중 분석하며 인간사의 희로애락을 살펴본다. 해설과 실연이라는 기본 구성은 지난해 성남시민회관에서 네 차례 진행된 프로그램과 동일하지만, 레퍼토리와 성악진의 선정은 더욱 심혈을 기울였다. 프로그램 구성부터 연주자 섭외까지 박종호의 꼼꼼한 손길이 더해졌음은 물론이다.
“'나비부인', '카르멘', '토스카' 같은 천편일률적인 프로그램은 배제하고, 정말 이야기가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가면무도회', '베르테르',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국내 무대에서 쉽게 감상하기 어렵고 제대로 소화하는 연주자가 많지 않은 작품들이죠. 예산이 좀 더 여유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각 곡의 역할을 지금 가장 원숙하게 소화하는 아티스트로 최고의 캐스팅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강혜명 씨, 임선혜 씨 등 국내외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자랑스러운 성악가들이 바쁜 스케줄 속에서도 흔쾌히 출연을 수락해주셔서 감사할 뿐이죠.”
박종호의 ‘근거지’인 풍월당은 이제는 단순한 클래식 음반숍을 넘어선 문화계의 아이콘에 가깝다. 2003년 오픈 당시부터 큰 화제를 모았던 풍월당은 이제는 카페 로젠카발리에와 예술아카데미, 여행팀에 이르기까지 음악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이 바탕에는 자타가 공인하는 클래식계의 막강 콘서트고어인 박종호의 체험이 녹아 있다. 해마다 두세 달씩 유럽 현지의 공연장을 누비며 한 해에 감상하는 오페라가 대략 50여 편, 오케스트라와 실내악 공연까지 더하면 그 이상이다. 세계 음악계의 메인스트림에서 옛 시대의 거장들 대신 지금 이 순간 무섭게 성장 중인 예술가들을 지켜보는 것은 그중 큰 즐거움이다.
“그림도 항상 옛 화가들의 작품만 볼 수는 없잖아요? 렘브란트도 가치 있지만 지금 현재의 것들이 중요하니까요. 저 역시 칼라스도 좋아하지만 요즘 가수들의 모습 역시 참 흥미로워요. 요나스 카우프만이나 안나 네트렙코를 비롯해 실력이 뛰어난 가수가 정말 많죠. 요즘은 음악계의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한 명의 스타가 탄생하기까지 수백, 수천 명의 경쟁을 뚫고 올라옵니다. 단지 외모가 멋져서 인기를 얻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실력 있는 예술가를 배출할 수 있는 기반이 두터워진 거죠. 비주얼뿐 아니라 연기력, 실력이 모두 뛰어나요. 안나 카테리나 안토나치와 카우프만의 <카르멘> 같은 공연은 완성도가 대단하죠. 개인적으로는 수잔 그레이엄이나 조피 코흐, 수잔 멘처 같은 메조소프라노도 무척 좋아합니다.”
다방면의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박종호지만, 그가 가장 큰 시간을 할애하는 작업은 글쓰기다.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 『불멸의 오페라』 등 여러 베스트셀러를 출간한 그가 현재 준비 중인 책만 해도 오스트리아 빈에 관한 에세이와 『불멸의 오페라』 3권, 일본 여행기와 패션에 관한 책까지 다양하다.
“외국 여행을 하다보면 한국 사람들이 드레스코드에 대한 걱정을 하는 모습을 자주 접해요. ‘옷’이라는 문화에 아직 익숙하지 못한 이들이 많다는 생각에 ‘옷을 어떻게 입는가’에 대한 책도 필요하다 느껴서 쓰게 됐죠. 저는 진료와 강의, 풍월당 운영에 관련된 일들 중에서 글을 쓰는 작업이 가장 즐거워요. 앞으로도 글 쓰는 사람으로 남고 싶을 정도로요.”
종합해보면 박종호의 글과 강의는 음악을 넘어 예술 전반에 걸친, ‘제대로 문화를 향유하는 법’에 대한 길잡이에 가깝다. 그의 바람 역시 마찬가지다. “현학적인 관객이 많아져야 합니다. 관객들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수준 낮은 공연은 줄어들테니까요. 결국 제가 강의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 역시 이런 관객들을 만드는 데 힘이 되기 위해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