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천성에 안 맞는 베토벤 연주… 겸손을 배웠다"

입력 : 2011.02.16 23:30

'피아노의 교과서' 안드라스 시프, 23일 서울·25일 대전서 리사이틀

"음악가들은 따분해지는 것(be boring)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요즘 젊은 연주자나 지휘자는 청중의 재미를 위해 연기하려고 해요. 머리를 흔든다거나 지휘대에서 뛰어오른다거나 하는 음악과 상관없는 움직임이 너무 많아요. 그런 행위는 청중의 주의를 분산시킵니다. 음악은 귀로 듣는 것이지 눈으로 보는 게 아녜요. 음악가는 엔터테이너가 아니에요. 저는 청중이 음악을 통해 영적인 메시지와 생각할 거리를 얻길 바랍니다."

'피아노의 교과서'로 불리는 안드라스 시프(Schiff·58)를 14일 도쿄에서 만났다. 헝가리 태생의 시프는 베토벤·바흐·슈베르트 등 고전적 레퍼토리를 격조 있게 해석하기로 이름난 거장(巨匠)이다. 13일부터 도쿄와 오사카에서 연주회를 갖고 있는 그는 21일 내한해 23일엔 서울에서, 25일엔 대전에서 베토벤 소나타 30~32번을 순서대로 연주한다.

“피곤하다. 그렇지만 기분 좋다.”15일 밤 일본 도쿄 오페라시티 콘서트홀에서 열린 피아노 독주회를 마친 안드라스 시프가 텅 빈 객석을 등진 채 무대 위에 섰다. /도쿄=곽아람 기자
“피곤하다. 그렇지만 기분 좋다.”15일 밤 일본 도쿄 오페라시티 콘서트홀에서 열린 피아노 독주회를 마친 안드라스 시프가 텅 빈 객석을 등진 채 무대 위에 섰다. /도쿄=곽아람 기자

이번 내한 공연에서 인터미션(중간 휴식)은 없다. 시프는 70여분을 쉬지 않고 연주할 예정이다. "인터미션은 연주에 방해가 돼요. 청중들의 집중력을 떨어뜨리니까요. 인터미션 후에는 청중들의 움직임과 기침 소리가 잦아집니다. 화장실에 다녀오거나 바에서 음료를 마시고 돌아온 청중들은 그 이전의 청중들과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되어 있어요."

그의 한국에서 연주할 곡들은 베토벤의 후기 작품이다. 베토벤의 소나타 32곡 중 가장 마지막에 작곡된 곡들로 만년의 베토벤이 귀가 들리지 않는 상태에서 쓴 것이다. "베토벤 후기 소나타에는 생(生)에 대한 용서와 겸허함이 녹아 있습니다. 그는 음악가에게 필수적인 청력을 완전히 잃었지만 삶에 대해 적의를 품지 않았어요. 제가 연주하는 베토벤 후기 소나타를 통해 청중들이 그의 성숙함을 배울 수 있길 바랍니다."

시프는 "베토벤의 후기 소나타 세 곡은 우리가 사는 이 세계와 또 다른 세계를 이어줘 연주할 때마다 단테의 '신곡(神曲)'이 연상된다"고 말했다. "단테의 신곡은 지옥에서 시작해 연옥을 거쳐 천국에서 끝이 나죠. 베토벤은 한 곡은 힘차게, 나머지 두 곡은 아주 고요하게 마무리합니다. 맑은 하늘에 수백만 개의 별들이 빛나는 것을 보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그 음악은 더 이상 지상에 속하지 않아요. 우주(宇宙)와 신(神)의 것이죠."

시프는 5세 때 처음 피아노를 시작했다.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와 의사이면서 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젊은 시절 그는 바흐 스페셜리스트로 정평이 나 있었으나 50세 때부터 베토벤에 천착하기 시작했다. 그는 2004년부터 2009년까지 유럽과 북미의 도시를 순회하며 베토벤 소나타 32곡을 연대기 순으로 연주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그 결과물을 8장의 실황 앨범으로 발매했다. 그는 "나는 베토벤의 후기 소나타를 연주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고 했다.

"젊을 때는 그의 고통과 인생에 대한 통찰을 이해하기 어려우니까요. 베토벤을 연주하는 건 새로운 도전이었어요. 사실 베토벤은 제 천성과는 맞지 않아요. 제게 맞는 건 오히려 슈베르트나 바흐죠. 저는 베토벤과 같은 고통을 겪어본 적이 없어요. 천성과 다른 곡을 연주한다는 건 연주자에게 힘든 일이죠.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것 같은 베토벤 연주를 통해 전 겸손을 배웠지요."

2008년 첫 내한 공연을 가졌던 시프는 "한국 청중들은 굉장히 예의 바르고 내 연주에 교감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연주가 끝난 직후의 정적(靜寂) 몇 초가 굉장히 중요해요. 그 정적의 순수성(purity) 말이죠. 유럽의 청중들에겐 그게 결여돼 있어요. 제가 아직 건반에서 손을 내려놓지 않았는데도 언제나 꼭 한 사람이 '난 곡이 끝난 걸 알아'라는 사실을 과시하듯 손뼉을 쳐요. 제겐 가장 큰 모욕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1시간 넘도록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앉아만 있었다는 걸 스스로 입증하는 겁니다."

책이나 영화, 미술 전시회 등 음악 외적인 것들로부터 영감을 많이 얻는다는 시프는 "지난번 내한했을 때 국립중앙박물관을 관람했는데 도자기의 발달사를 한눈에 볼 수 있었던 도자기실이 아주 인상적이었다"면서 "이번에도 다시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인터뷰 다음 날인 15일 밤 도쿄 오페라시티 콘서트홀에서 열린 연주회에서 시프는 슈베르트의 '악흥의 한 때', '즉흥곡집 D899', '3개의 피아노곡', '즉흥곡집 D935'를 차례로 연주했다. 그가 "내 천성과 가까워 어렵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고 했던 슈베르트의 곡들을 유려한 선율로 마무리하자 1800석을 꽉 채운 청중들은 긴 박수로 화답했다. 슈베르트 애호가라는 미야와키 미사(宮脇美沙·28·NHK 뮤직 디렉터)씨는 "굉장히 감성적이고 따뜻한 연주였다"면서 "시프의 슈베르트는 사람의 목소리를 닮았다"고 말했다.

▶안드라스 시프 피아노 리사이틀, 23일 오후 8시 서울 예술의전당, 25일 오후 7시 30분 대전 문화예술의전당 (02)541-3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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