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미래를 걷는 '꿈의 탐험가'

입력 : 2011.01.17 10:34

뮤지션 양방언

김현철(이하 김) ‘양방언梁邦彦’이란 이름이 좀 독특한 느낌인데요. 중국 이름 같은 느낌도 나고요.

양방언(이하 양) 재일 교포 1세대였던 아버지께서 한자에 대한 관심이 커서 공부를 많이 하셨는데, 글자 하나하나에 의미를 담아 지어주신 이름이에요. 아버지는 제가 당연히 한국인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셨지만, 전형적인 한국 이름이면 혹 어려움을 겪을까봐 걱정도 많으셨죠. ‘나라’를 의미하는 ‘방’은 “지금 우리 세대는 어렵지만 네가 자라면 세계를 오가며 여러 나라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을 시기가 온다”며 큰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붙여주셨고요. ‘언’은 좀 일본적인 단어죠.

김 : 의사 출신 음악인이라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인데, 언제 처음 음악에 빠졌나요?

양 : 누나가 피아노를 즐겨 쳐서 초등학교 때부터 배우기 시작했어요. 그때만 해도 남자가 피아노를 친다는 게 왠지 싫었죠. 그런데 레슨을 받으러 간 곳에 예쁜 여학생이 있어서…(웃음).

김 : 대부분 그런 것들이 계기가 되죠(웃음).

양 : 그렇게 클래식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팝음악을 접하면서 본격적인 관심이 생겼죠. 음악을 조금씩 배우다 보니 선율을 연주할 수 있게 되면서 재미가 붙더라고요. 그게 중학교 1학년 즈음이었어요.

김 :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를 보면, ‘사람은 10대 시절에 받은 문화적 충격으로 살아간다’는 이야기가 나오죠. 그 종류가 음악이냐 미술이냐 이런 차이일 뿐이죠.

양 : 맞아요. 가장 감성적이고 예민한 시기에 받은 영향들이 가장 깊숙이 자리 잡는….

김 : 공부 잘하던 아들이 갑자기 딴 길을 간다고 하니 집에서 반대가 심했겠어요.

양 : 의사였던 아버지는 저도 그 길을 잇기를 간절히 바라셔서, 음대에 진학하고 싶다는 말 자체를 꺼낼 수 없는 분위기였어요. 일단 의대에 입학해 음악을 하겠다는 결심으로 나름대로 도망갈 수 있는 길을 생각해뒀는데, 사실 음악을 하기 위해 의대에 간다는 자체가 불순했던 거죠. 대학에 들어가면 다른 좋은 음악인들을 많이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도 컸는데, 마침 퓨전 밴드로 유명한 티스퀘어를 배출한 서클이 있었어요. 그곳에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연주하며 즐거움을 찾았죠. 대학 친구들도 음악 활동을 이해해줘서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고.

김 : 그러다 어떻게 직업으로 결심하게 됐나요? 사실 의대에 들어가면 학업에 정신없이 바쁘고, 보통은 결국 ‘음악을 좋아하는’ 의사가 되는 게 일반적인데 말이죠.

양 : 대학을 그만두고 곧장 음악에 뛰어들고 싶었는데, 아버지가 병으로 입원하셨어요. 자식의 뒷모습만 봐도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채는 게 부모 마음이라, 투병하시는 와중에도 ‘이 녀석이 음악을 하러 가는구나!’ 하고 엄청나게 신경을 쓰셨어요. 일단 음악은 그만두고 의사 면허를 따기로 약속했죠.

그런데 면허를 받은 뒤 바로 음악을 하려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혹 음악을 하다가 힘들어지면 ‘그냥 의사를 할 걸 그랬다’고 후회할 수도 있으니, 일단 의사라는 직업을 겪어보자고 결심했죠. 마취과 의사로 1년을 지내보니 확실한 답이 나왔어요. 참 훌륭한 직업이지만 역시 난 음악이구나 하고. 더 열심히 의사를 잘할 수 있는 이들이 많은데, 이 상태를 계속하는 건 아니라는 확신이 섰죠.

김 : 음악에 대한 열망이 어린 시절부터 이어졌기 때문에 과감히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거네요. 결정에 이르는 그 과정은 물론 어려웠지만.

양 : 순간의 결정이란 결국 일생을 좌우한다는 점에서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당시 스물다섯 살이었는데 일단 결심을 하고 나니 마음이 아주 가벼워져서 달랑 5만 엔만 쥐고 가출했는데도 행복했을 정도였어요. 대학 시절부터 좋은 뮤지션들과 작업한 것도 운이 좋았고요. 그 친구들이 ‘잘 돌아왔다’며 반겨주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죠. 

김 : 초기 활동을 보면 일본의 인기 가수 하마다 쇼고와 퓨전 밴드 카시오페아를 비롯해 홍콩 밴드 비욘드 같은 걸출한 아티스트들과 작업했죠.

양 : 초기에는 아주 작은 일부터 조금씩 시작했어요. 스튜디오 세션 활동을 많이 하다가 어느 날 카시오페아를 키운 프로듀서를 만났죠. 연주만 하러 갔는데, 작업을 같이 해보자며 제의하시더군요.

김 : 온라인 게임 '아이온'의 음악도 국내 게임 음악으로선 드물게 대단히 큰 히트를 거뒀죠. 게임 음악은 처음이었는데 결정에 고민은 없었나요?

양 : 당시 임권택 감독의 영화 '천년학'의 작업을 하던 시기였는데, 엔씨소프트에서 의뢰가 왔어요. 양쪽의 분위기가 정말 대조적이라 굉장히 색다른 느낌이었죠. 게임 회사다보니 프로젝트 스태프 모두가 20대인데 그 젊은 분위기가 참 재미있더라고요. 그들이 의뢰하면서 이야기한 “이제까지의 게임 음악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꿀,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말이 참 인상적이었어요. 장르와 악기, 방법은 어떤 것도 좋으니 제약이 없는 음악, 작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음악을 함께 만들어보자는 말에 흥미가 생겨 결심을 했죠. 런던 애비 로드 스튜디오에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작업했는데, 단원들도 모두 영화음악 같다며 감탄했죠.

김 : 일본에서는 게임 음악이 크게 성공을 거둔 경우가 많잖아요? '파이널 판타지' 같은. 아마 그런 위상의 음악을 원했나보네요.

양 : 네, 제게도 굉장히 재미있고 좋은 경험이었죠.

김 : 지난해 12월 19일 첫 방영한 KBS 다큐멘터리 '동아시아 생명대탐사-아무르'의 음악은 '차마고도' 이후 오랜만에 작업한 다큐멘터리 음악이지요? 러시아와 중국, 몽골을 가로질러 흐르는, 미답의 아무르 강 지역에 대한 조명이라고 들었습니다. 보통 이런 경우 작품 자체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작업을 결심하겠죠?

양 : 그게 가장 중요하죠. 그 작품을 좋아하고, 방향이 서로 잘 맞아야 하고. 그 선택이 작업의 80%를 좌우하는 것 같아요. 그 단계가 잘 이루어지면 중간에 수정이 필요해도 마지막까지 잘 가더라고요. '차마고도' 역시 그 이전에 작업했던 KBS 다큐멘터리 '도자기'팀이 ‘새로 함께 하고픈 작업이 있는데 어떠냐’며 영상을 보여주었는데, 보자마자  ‘꼭 해야겠다, 이건 내 거다!’라는 느낌이 딱 왔어요(웃음). '아무르'는 10년 전쯤 다큐멘터리 작업차 몽골 여행을 떠났을 때 실제 아무르 강의 모습을 본 경험이 있어서, 이번 작업 영상을 보니 그때 기억이 떠올라 반가움이 왈칵 밀려들더군요.

김 : 음악이 잘 나오겠네요.

양 : 열심히는 했는데…(웃음).

김 : 일을 시작할 때는 제작팀과 잘 맞는다고 판단해서 선택하는 게 정상인데 우리나라는 술자리에서 ‘일단 합시다!’ 모드로 진행될 때가 많죠(웃음). 그러다보니 뒤로 갈수록 엉키는 일도 생기고요. 이건 양보하고, 이건 양보 못한다는 부분들이 잘 세팅되어 풀려가야 맞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거든요.

양 : 그래서 처음이 중요하죠. 그게 안 되면 그 순간부터 어려워져요. 미리 서로 파악하고 인정하면서 가는 게 좋죠.

김 : 클래식부터 팝, 록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수용하고 있죠. 스스로를 어떤 뮤지션이라고 생각하나요?

양 : 크로스오버 아티스트란 호칭을 종종 듣는데, 제가 클래식이나 재즈를 비롯해 여러 장르에서 완벽한 음악가라기보다는 ‘그 곁을 지나왔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아요. 그 음악을 지나왔고 지금도 영향을 받으며 좋아하는…. 뭔가 하나로 규정짓기보다는 그 순간 마음에 들고 좋아했던 마음의 표현을 담은 결과물이죠.

김 : 음악 외에 관심사가 있나요?

양 : 도쿄에 살 때는 운동을 좋아했어요. 스튜디오 안에 머무는 시간이 많으니 건강 챙기는 데 신경을 썼죠. 지금은 집에서 키우는 큰 개와 함께 한 시간씩 산을 산책해요. 피아노 연주도 나름대로 운동이 되고요. 그러다보면 하루가 금방 갑니다.

김 : 산 얘기가 나오니 생각나네요. 몇 년 전부터 도쿄를 떠나 휴양 마을로 유명한 나가노 현 가루이자와 산자락에 스튜디오를 만들어 작업한다고 들었습니다. 사실 한국 음악인들은 대부분 서울 강남에서 작업을 많이 하는데 일본도 크게 다르진 않을 듯싶거든요. 거처를 옮긴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양 : 일본도 음악 작업의 중심은 도쿄예요. 지금도 그렇죠. 제가 15년 전까지는 가수들의 프로듀싱 작업이 많았는데, 히트곡을 위해 공장처럼 3일 만에 몇 곡을 뚝딱 만들어내는 작업의 연속이다보니 지치더라고요. 곡이 히트하지 못하면 애써 만든 작품도 쓰레기통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과정에 의문이 생겼죠. 어쩌면 다른 음악을 하는 것도 길이 아닐까, 나는 노래는 하지 않으니 그렇다면 연주 음악을 해보는 건 어떨까 고민을 시작했어요. 몇 년이 흐른 뒤에 내 이름을 건 음악, 다른 영역에서 음악을 하고 싶다는 결심이 섰고 영상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죠. 도쿄에서 큰돈을 들여 대형 스튜디오를 짓는 것보다는 아예 반경을 바꾸면 어떨까 결심했는데, 환경과 작업 스타일 모두 달라진 힘든 과정이었어요.

김 : 뮤지션들은 도시에서 적당히 떨어진 전원생활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데, 막상 그러긴 또 어려워요. 자신이 들고 있는 것들을 놓기가 쉽지 않거든요.

양 : 그렇죠. 계속 도쿄에 산다면 스튜디오 세션 작업 같은 여러 일감이 계속 생길 텐데, 이런 부분들을 다 포기하는 거죠. “전 이제 산에 가니 이런 작업은 못하겠습니다”가 되거든요. 그렇게 되면 ‘아, 이제 저 사람은 이 일은 하지 않겠구나’라고 인식되고.

김 : 한국은 몇몇 사람 외엔 쉰 살이 넘어서도 현역으로 음악을 하는 사람을 찾기 힘들어서, 저는 그런 이유로 조용필 씨가 존경스러워요. 가수로서 예순이 넘어서도 활동한다는 게 참 대단하거든요. 요즘 일본에서는 한국 가수들의 열풍이 대단하다고 들었는데 어떤가요?

양 : 일본에서 카라나 소녀시대가 너무 잘나가서 난리가 났죠. 점심을 먹으면서 위성방송 채널을 돌리다보면 전부 한국 드라마고요. 전 한국 드라마 자체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아주 좋은 영향이 많다고 봅니다. 실제로 한국에 대한 일본인들의 인식을 많이 바꿔놓았거든요. 금방 사라질 일시적인 붐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더군요. 다음 단계 문화로 도약을 위한 과정이 아닐까요? 이 다음엔 또 다른 음악, 또 다른 한국 문화가 흘러와 다른 인식을 심어줄 것 같아요. 지금은 ‘입구가 열렸다’는 느낌입니다. 한 번 열린 입구에서 계속 무언가가 들어오는…. 요즘 일본 음반사는 한국 아티스트에 대한 관심이 정말 커요.

김 : 오는 1월 21~22일에 Ax-Korea에서 영상콘서트 <네오라마 Neorama>를 준비하고 계시죠?

양 : 2009년 세종문화회관에서 한국 활동 10주년을 정리하는 공연을 마쳤고, 지난해 5월에는 명동성당에서 자선 공연을 열었어요. 10월 그랜드민트페스티벌까지 참여한 뒤 이제까지와는 다른 시도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 연장선상이자 마지막 도달점으로 이번 네오라마 콘서트를 구상했는데, 계기가 좀 재미있어요. 함께 종종 작업하는 일본 애니메이션 회사 사장님이 한국 공연을 자주 보러 왔는데, “재미있긴 한데 왜 양방언 씨 작품만 하느냐, 다른 다양한 영상 작품도 함께해보라”고 권하더군요. 그냥 영상을 보여주면서 연주하는 건 재미가 없으니 기왕 한다면 한 걸음 더 깊이 들어보고 싶더라고요. 영상 작가들이 내 음악을 듣고 영상을 만들면 그 영상에서 내가 다시 영감을 받아 작업하고, 서로의 감성을 받아들여서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하는 작업이죠. 저로서도 첫 시도예요. 지금은 영상 작가들에게 소재를 던지고, 그걸 받아 재구성하는 단계입니다.

김 : 인생에서 이루고 싶은 것을 꼽는다면 무엇인가요? 저는 아이에게 친구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는 꿈이 가장 크거든요.

양 :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싶어요. 하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위해서 다른 것을 희생하는 대신 공존하면서 후회 없는 삶, 그리고 계속 걸어갈 수 있는 삶을 꿈꾸죠. 제가 가는 미래에는 힘든 일보다 즐거운 일이 많으리라는 믿음을 간직하고, 그렇게 쭉 걸어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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