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명의 낯선 얼굴들. 지난 8월 성남 아트센터와 진행한 '앱솔루트 클래식'의 오케스트라 단원들로, 모두 오디션을 거쳐 선발된 젊은 연주자들이다. 한 번도 서로 같이 연주해 보지 않은 우리는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 하나의 소리로 묶일 수 있을까. 모든 단원들의 열정은 대단했다. 매일 오전 3시간, 그리고 오후 3시간, 이렇게 총 6시간을 연습해도 힘든 기색이 없었다.
우리의 목표는 '살아있는' 연주를 하는 것이었다. 음표 하나하나 안에 숨어 있는 생명력을 살리는 연주. 음악 속에 이미 존재하는 힘을 숨 쉬는 감동으로 전하고 나누는 연주. 이런 연주는 혼신을 다해야만 가능하고 이런 연주만이 감동을 줄 수 있다.
오케스트라는 연주자들의 단순한 모임이 아니다. 한 명의 연주자와 마찬가지로 한 오케스트라만의 정신과 혼이 분명히 있어야 한다. 내가 온 마음을 모으고 온 신경을 집중할 때, 비로소 우리의 몸은 마음을 따라 연주하게 된다. 그래서 그 짧은 시간 안에 놀라운 성장과 발전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열정은 우리 안에 있는지 몰랐던 힘을 우리에게 주었다. 사명감을 갖고 연주에 임할 때, 그 소리를 듣는 모든 사람은 이 특별한 살아있는 소리를 바로 육감적으로 느낀다.
우리의 집중이 가장 무르익은 때는 마지막 연주회였다. 단원들과 난 분명히 한마음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반응하고, 난 그들에게 반응하면서 연주했다. 그리고 그 연주를 함께한 청중들도 우리의 연주 속에 담긴 열정을 느꼈고 뜨겁게 반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2주간 4개의 교향곡을 준비하고 3회의 연주회를 하면서 그 누구보다 내가 가장 많이 배운 것 같다. 가장 소중한 가르침은 우리는 뭉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 바로 불가능은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라는 정체성의 힘은 대단히 크다. 특히 우리나라는 '우리'라는 생각이 삶에 배어 있는 독특하고 유일한 문화를 갖고 있다. 해외의 다른 언어로는 다 내 집, 내 엄마, 내 나라, 이렇게 '나' 위주로 생각하고 말하지만, 유독 우리 민족은 우리 집, 우리 엄마, 우리나라, 이렇게 생각하고 말한다.
바로 이 '우리' 개념, '우리' 힘이 정말 존재한다고 믿게 되었다. 개인이었다면 2주 동안 할 수 없는 발전과 연주를 103명 우리이기에 할 수 있었다. 103명의 '나'였다면 불가능했을 연주가 하나의 우리가 되었기에 가능했다.
이것이 음악의 힘이다. 103명의 '나'를 하나의 우리로 만들어 준 음악. 음악의 특별함이 있다면 모두가 설 자리가 있고, 빠지면 안 되는 꼭 필요한 역할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지금 있는 이 자리, 그리고 내가 어떻게 이 자리의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정체성과 우리의 연주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역할의 중요성이 인정받고, 그 사람과 그 옆 사람의 자리가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공존한다면, 사회 역시 음악처럼 감동이 넘치는 곳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뉴욕 집에 돌아와 무대 위에서 다 함께 찍은 사진을 내 연구실에 걸었다. 이 사진이 찍힌 그 순간의 가능성을 기억하며 내년 앱솔루트 클래식까지 더욱 발전하고 성숙한 음악가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나 자신과, 또 사진 속 우리 오케스트라와 조용히 약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