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있어 무대가 좋다

입력 : 2010.10.27 09:54

배우 박지일

배우 박지일
배우 박지일

유약함과 강렬함이 공존하는 그의 연기는 자칫 충격적 사건 그 자체에 매몰될 수 있는 인물을‘부피감 있게’ 무대에 세운다. 그만한 부피감을 만들 수 있는 배우는 많지 않다.

“처음엔 내 역이 아니었다”

그 말고 어떤 배우가 박운형을 연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달리 처음 그가 맡았던 역은 상대역이라 할 유 기자였다고 한다. “연출은 에너제틱한 배우를 원했던 것 같다.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때부터 너무 하고 싶은 역이었는데 박운형 역을 찾지 못해 연습이 난항인데도 아무도 나를 ‘박운형’으로 떠올리는 사람이 없었다.” 박운형을 찾지 못해 연습마저 중단되어 있던 사이 그는 수염을 기르고 머리를 짧게 자르고 연출 앞에 나타난다. “그때야 그 역이 나에게 왔다.”

박운형은 연극이 세상의 고통을 정화하는 곳이길 바랐던 그로토프스키의 ‘가난한 연극’에 매료되어 그가 연극을 만들었던 폴란드에서 배우로 살고 있는 인물이다. '슬픔의 노래'의 반전은, 박운형의 ‘가난한 연극’에 대한 열정이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압군으로서 죄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 짐작했던 것과 달리, 감당할 수 없는 크기로 압도하는 폭력의 고통을 견뎌내는 것 - 그것은 가해자의 폭력에 대한 희열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 이라는 그의 고백이다. 저 깊숙한 심연으로부터 길어 올린 박운형의 고백은 단연 <슬픔의 노래>의 압권인데, 박지일은 ‘박운형’이 말하고 있는 극한의 상황, 극한의 고통을 견뎌내고 있는 배우라는 존재를 그대로 우리 눈앞에 보여준다.

얼음과 불꽃, 상반된 두 가지의 조합을 떠올리게 하는 '슬픔의 노래'는 한 번 공연하고 나면 에너지가 다 소진되는 느낌이다.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에너지를 다 쏟아냈을 때 오는 편안함이 있다. 배역에 갇히지 않는 자유로움을 처음 느꼈다.”

‘지성과 광기’ ‘얼음 위의 불꽃’처럼 그의 연기를 설명하려는 이들은 항상 상반된 두 가지의 조합을 떠올린다. 그도 그럴 것이 무대에서의 박지일은 외모나 체격에서 풍기는 유약함이 먼저 다가오지만 그 크기를 알 수 없는 긴장으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를 조각상에 봉인하는 ‘상곤’('서안화차'), 세상의 폭력에 조롱당하고 사랑하는 아내 마리를 살해하게 되는 말단 병사 ‘보이체크’('보이체크'), 한 때 배우였지만 도살장에서 도축을 하고 있는 ‘천편’('도살장의 시간') 등 그는 유독 극한의 사건으로 치달아가는 인물들을 많이 연기했다. 유약함과 강렬함이 공존하는 그의 연기는 자칫 충격적 사건 그 자체에 매몰될 수 있는 인물을 ‘부피감 있게’ 무대에 세운다. 그만한 부피감을 만들 수 있는 배우는 많지 않다.

놀랄 만한 연기 변신마저도 그 모습 그대로인 것처럼 “글쎄 너무 비슷한 성격으로 등장한다는 지적도 받았다.” 그 때문에 전혀 다른 이미지로 변신했던 것일까. 한 평론가는 '바다와 양산'에서 수다스러운 동네 아저씨로 분한 그를 두고 그동안 그를 고정된 이미지로 가둬두었던 연출가들을 원망하기도 했다. '맘마미아!'의 빌이나 '바다와 양산'의 집주인 남편 역은 그를 지켜보아온 이들에게 굉장히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서안화차'를 연습하던 중에 우연히 '맘마미아!' 오디션을 봤다.

그때 불렀던 노래가 ‘Sealed With A Kiss’였는데 뮤지컬 오디션 곡으로는 너무 평범한 이지팝이었다. 그런데 캐스팅이 되었더라. 본래 빌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다른 공연들에서는 정글을 헤치고 다닐 듯한 모험가의 이미지다. 부드럽고 소심한 빌은 내가 연기하고 있는 한국 공연에서만 유일하다고 한다.” 그가 분한 빌의 캐릭터가 바뀌면서 다른 두 명의 아빠 후보들의 성격도 조금씩 바뀌었다.

전작들과 비교하면 깜짝 놀랄 연기 변신이라 할 만하지만, 또 ‘빌’을 보고 있으면 마치 오랫동안 지켜보아왔던 그 모습 그대로인 것처럼 자연스럽다. 정말 우리는 배우 박지일을 너무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박지일은 배우의 카리스마로 배역을 압도하는 배우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역할에 스며드는 배우다. 그리하여 평범한 듯한 외모와 때로는 왜소해 보이는 그의 체구마저도 배우로서는 좋은 조건으로 보인다.

“나는 33년 동안 부산에서 살았다. 서울에서 무대에 섰을 때 말을 고치느라 정말 고생 많이 했다. 또 나는 소리통이 좋은 배우도 아니다. 하지만 노력하니까 에너지가 나오더라.” 그가 지난해부터 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화술을 가르치고 있는 것도 자신의 경험이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서다.

배우 박지일
배우 박지일
길들여지고 사랑하게 되고 친해지고

지금 그가 연습 중인 작품은 '33개의 변주곡'이다. 베토벤의 '디아벨리 변주곡'을 바탕으로 한 이 연극에서 박지일은 베토벤을 연기한다. ‘천재라고 추앙받지만 비호감형’인 베토벤이 처음엔 썩 내키지 않았다. “200년 전 실존했던 인물이 무대 위에 서 있을 때 관객들은 많이 낯설 것 같다.” 게다가 베토벤의 '33개의 변주곡'을 연구하고 있는 캐서린의 공간과 그 곡을 작곡하고 있는 베토벤의 공간이 병렬되고 중첩되는 연극의 구조도 그로서는 만만찮은 도전이다. “단편화된 장면 장면이 전개되기 때문에 베토벤이 괴팍하거나 폭력적으로 비칠 수도 있다.” 그런데 또 연습을 하다 보면 작품에 길들여진단다. 몇 달을 함께할 친구고, 마음을 열면 작품이 점점 좋아진다. “길들여지고 사랑하게 되고 친해지고… 물론 거기에서 오는 과오도 있다.”

그는 자신에게 사로잡혀 있는 관객들, 자신의 눈빛 하나, 손짓 하나에 요동치는 극장에서 배우로서 희열을 느끼지만, 또한 평범한 일상의 삶도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의 인터뷰를 보면 유독 배우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사회 구성원으로서, 가족으로서 자신의 삶을 잘 꾸려가는 것을 강조한다. “배우는 일상을 잘 꾸려가고 그러한 삶이 연기에 스며들어 있어야 한다. 스스로의 삶이 불행하고 힘들면 일상적이고 섬세한 역할을 하기 힘들 것 같다. 나를 반가워하고, 나를 만나는 것이 좋고, 그래서 믿을 만한, 관객들에게 그런 배우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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