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중요한 배우는 조명이다"

입력 : 2010.08.12 03:13

'이미지 연극' 개척한 실험극의 巨匠 로버트 윌슨
연출·연기한 1인극 '크라프…' 1시간 공연에 조명 200번 바꿔
"배우는 말 없이도 강렬해야… 움직임부터 만들고 대사 덧대"

세계적인 실험극의 거장이 한국 무대에 오른다. 대사를 최소화하고 느린 움직임과 조명을 강조하면서 '이미지 연극'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미국 연출가 로버트 윌슨(Wilson·69·사진)이다. 그는 이번 가을 서울에서 열리는 제5회 연극올림픽 개막작으로 '크라프의 마지막 테이프(Krapp's Last Tape)'를 가져온다. 사무엘 베케트가 쓴 희곡을 그가 연출하고 배우로도 출연하는 1인극이다.

레슬리 레슬리-스핑크스 제공
레슬리 레슬리-스핑크스 제공
어릴 적 말더듬이였던 윌슨은 천천히 반복해 말하는 법을 익혔던 체험을 연극적 방법론으로 완성했다. 미술을 전공한 그는 청각장애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청각장애인의 눈짓'(1971), 움직임·음악·이미지의 불협화음을 탐색한 '해변의 아인슈타인'(1976) 등으로 기억된다. 윌슨은 이메일 인터뷰에서 '크라프의 마지막 테이프'에 대해 "주인공 크라프가 30년 전 그 여인이 마지막 진실한 사랑이었음을 깨닫듯이 관객들도 잃어버린 것에 대해 돌아보게 하는 연극"이라고 말했다.

―신작에 출연하기는 '햄릿' 이후 10년 만이다.

"난 베케트에게 친밀감을 느낀다. 연출을 의뢰받고 '무대에 다시 올라 뭔가 해야 할 때'라는 생각을 했다."

―이 연극도 소음과 침묵을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무대언어란 무엇인가?

"당신이 냄새를 맡거나 듣거나 보게 되는 모든 것이다."

서울연극올림픽 개막작인‘크라프의 마지막 테이프’. 70세의 노인 크라프(로버트 윌슨)는 자신의 삶에서 마지막으로 행복했던 30년 전의 음성 기록을 듣는다. /레슬리 레슬리-스핑크스 제공
서울연극올림픽 개막작인‘크라프의 마지막 테이프’. 70세의 노인 크라프(로버트 윌슨)는 자신의 삶에서 마지막으로 행복했던 30년 전의 음성 기록을 듣는다. /레슬리 레슬리-스핑크스 제공
―무대 디자이너이기도 한 당신은 '조명이 가장 중요한 배우'라고 말한다.

"이 연극은 1시간짜리지만 조명이 200번쯤 바뀐다. 빛은 공간을 창조한다. 빛이 없다면 공간도 없다. 크라프의 고독을 강조하려고 하진 않았다. 빛은 어둠을 더 어둡게, 어둠은 빛을 더 빛나게 만든다. 이 연극은 많은 그늘(shadows)을 이용한다."

―움직임·조명·대사 등을 어떤 방식으로 뭉치나?

"배우의 몸과 움직임은 대사 없이도 강한 힘을 지녀야 한다. 리듬을 가진 움직임부터 만든다. 그다음에 대사를 보태고 조명 등 다른 요소를 덧댄다."

연극의 주인공 크라프는 70세 생일을 맞은 노인이다. 매년 그래 왔듯 지나간 1년에 대한 녹음을 준비하던 크라프는 30년 전 테이프에 담긴 음성 기록을 듣는다. 그는 '한 여인과의 관계가 끝났다'고 말하는 부분을 반복 재생한다. 공연은 과거 자신과의 대화인 셈이다.

―이 희곡을 접했을 때 첫인상은?

"크라프에게서 베케트를 느꼈다. 아마도 자전적인 이야기일 것이다. 내가 무대에서 거의 내내 침묵을 지켜야 한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당신은 단순미와 형식주의 때문에 베케트와 비교되지만 희곡과 무대언어는 다르다. 무엇에 집중했나?

"전부 그리고 아무것에도(Everything and nothing). 베케트의 희곡과 내 연극은 같을 수도 있고 완전히 다르게 비칠 수도 있다."

―이 연극은 뼈대만 있고 살점은 없는 것 같다.

"가장 신비로운 것은 뼈대나 살점이 아니라 피부, 즉 표면이다. 나는 세부적인 동작과 시간, 조명 등을 철저히 계산하는 이미지 연극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번 내한 공연은 '바다의 여인' 이후 9년 만이다. 관객이 특별히 준비할 게 있나?

"열린 마음이다. 그래야 관객 각자에게 다른 체험으로 남을 수 있다."

▶9월 24~25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02) 747-2903


☞ 서울연극올림픽은… 13개국서 날아온 '사랑' 연극

전 세계의 연극인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연극올림픽은 1995년 그리스에서 시작됐으며, 일본·러시아·터키에 이어 한국이 5회째다. 9월 24일 '크라프의 마지막 테이프'(국립극장)로 개막해 11월 7일까지 45일간 이어진다.

'사랑'을 대회 주제로 내세운 서울연극올림픽은 13개국의 연극 25편으로 속을 채운다. 해외 초청작 중엔 일본 연출가 스즈키 다다시의 '디오니소스'(9월 25~26일, 명동예술극장), 독일 연출가 토마스 오스터마이어의 '햄릿'(사진·9월 29일~10월 1일, 남산예술센터), 중국 연출가 티엔친신의 '홍장미 백장미'(10월 11~13일, 대학로예술극장)가 주목받고 있다. 임영웅 연출의 '고도를 기다리며'(10월 22~31일, 아르코예술극장) 등 한국 연극 13편도 관객을 만난다.

최치림 서울연극올림픽 예술감독(한국공연예술센터 이사장)은 "동서양의 연극이 만나고 교류하는 축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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