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ABC] 악기 소리는 나는데… 단원들은 어디갔을까?

입력 : 2010.08.05 02:59

[클래식 ABC] 오케스트라 '잠복 연주'

"도대체 단원들이 어디서 연주하는 거야?"

해외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영웅의 생애'를 연주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작곡가 자신을 영웅에 빗대어 지극히 호기롭고도 낭만적인 이 교향시의 4부에 들어갈 즈음, 트럼펫 소리가 무대 뒤편의 복도에서 울려 퍼지면서 영웅과 적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개시를 알리지요. 이 대목에서 뒷자리에 앉아계시던 선배 한 분께서 조용히 물어오셨습니다. 갑자기 음악회의 현장 해설자가 된 것만 같았습니다.

독일 뮌헨 궁정 오페라의 수석 호른 연주자의 아들로 태어나서 16세 때 세레나데를 발표하고 지휘자로도 활동했던 슈트라우스는 다채로운 관현악의 효과를 실험하기 위해 이렇듯 무대의 전후(前後)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지요.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가만히 무대에 앉아서 연주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대략 프랑스 낭만주의 작곡가 베를리오즈 즈음입니다. 영국의 셰익스피어 배우 해리엇 스미스슨(Harriet Smithson)의 연극을 본 뒤 사랑의 열병을 호되게 앓았던 청년 시절 작곡가의 걸작인 '환상 교향곡'의 3악장이 대표적이지요.

'들의 풍경'이라는 이 악장에서 작곡가는 "어느 여름날 해질 무렵에 젊은 예술가는 두명의 목동이 부는 피리 소리에 귀 기울인다"는 해설을 붙였습니다. 연주에서는 무대 위의 잉글리시 호른과 무대 뒤편의 오보에가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 이 정경을 표현해냅니다.

후기 낭만주의로 접어들면서 말러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 관현악적 원근법에 주목했던 작곡가들이 이러한 흐름을 적극적으로 발전시킵니다. 말러는 교향곡 1번 1악장부터 트럼펫 주자들에게 '먼 곳에서' 팡파르를 연주하라고 지시하지요. 이 때문에 종종 단원들은 무대 뒤에서 먼저 연주하고서 발소리조차 조심스럽게 슬금슬금 입장하지만, 관객들에게는 '어떻게 연주회에 지각할 수 있느냐'는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이 같은 시도는 무대 위의 연주자와 무대 아래의 청중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에서 탈피하려는 고민에서 나온 것이기도 합니다. 20세기 독일 작곡가 슈톡하우젠의 '그룹들(Gruppen)'에 이르면 3명의 지휘자와 3개의 오케스트라를 처음부터 분산해놓고, 관현악이 한복판의 관객을 둘러싸는 듯한 모양새를 연출합니다. 청중은 마치 오케스트라의 소리에 포위된 듯한 아찔한 기분을 느낄 수 있겠지요.

그날 연주회에서 선배의 질문을 받은 뒤 고심 끝에 '후기 낭만주의에 이르면 관현악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단원들을 다양한 위치에 배치하기도 합니다'라는 메모를 적어서 건네 드렸습니다. 하지만 공연이 끝나고서 선배께선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녀석아, 공연장이 이렇게 어두운데 글씨가 보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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