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한 활놀림으로 세계를 휘감다

입력 : 2010.06.24 03:03

'해외 초청연주 100회' 서울바로크합주단… 23년간 19개국 '지구 10바퀴'
"반세기 전에 수입된 클래식, 이젠 본고장에 되돌려 줄 때"

500여년 역사를 품은 대성당이 근사한 연주회장으로 변했다. 1462년에 지은 핀란드의 난탈리(Naantali) 대성당은 세월의 더께가 우아하게 내려앉은 십자가상과 샹들리에가 성스런 분위기를 자아냈고, 격자무늬 유리창 사이로 은은히 비치는 햇살은 중세의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하얗게 회칠한 벽과 아치형 천장은 천연의 음향 효과를 냈다. 핀란드 서부의 휴양도시 난탈리는 인구 14만명의 작은 마을이지만 올해 31년째를 맞는 실내악 페스티벌로 유명한 ‘음악도시’이기도 하다.


1980년 첼리스트 아르토 노라스(Noras)가 창설한 이후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Stern)과 안네 소피 무터(Mutter), 피아니스트 에밀 길렐스(Gilels)와 소콜로프(Sokolov) 등 100여개의 실내악 단체와 500여명의 연주자가 참석했다. 해마다 5만여명의 음악팬을 불러들일 만큼 유럽 정상급 음악제로 꼽힌다.

김민 음악감독.
김민 음악감독.
지난 2005년과 2007년에 이어 세 번째로 '난탈리 음악 페스티벌' 폐막공연에 초청받은 서울바로크합주단(음악감독 김민 서울대 명예교수)은 지난 20일 공연에서 해외 초청연주 100회 기록을 세웠다. 올해 창단 45년을 맞은 이 악단은 한국 클래식 음악의 저력을 세계에 전하는 '실내악의 외교사절단'으로 새 역사를 썼다.

무대에 오른 서울바로크합주단은 이탈리아 작곡가 레스피기(Respighi)의 '고대 아리아와 춤곡'으로 문을 열었다. 옛 이탈리아 음악에 흥미를 느낀 작곡가가 류트(lute)곡을 관현악곡으로 편곡한 작품으로, 23명의 주자들은 점도(粘度) 높은 활 놀림으로 합주단 특유의 부드러움을 선사하며 황홀과 비감의 깊이를 더해갔다. 윤이상의 '현을 위한 융단'은 특유의 그로테스크하면서도 환상적인 분위기를 잘 살려냈고, 멘델스존의 '클라리넷, 첼로, 현을 위한 협주곡'은 클라리넷 주자 미셸 레티엑(Lethiec)과 첼리스트 송영훈이 협연했다.

서울바로크합주단이 100번째 해외 초청연주를 한 지난 20일 핀란드 난탈리 대성당에서 클라리넷 주자 미셸 레티엑, 첼리스트 송영훈과 협연하고 있다. /김경은 기자
서울바로크합주단이 100번째 해외 초청연주를 한 지난 20일 핀란드 난탈리 대성당에서 클라리넷 주자 미셸 레티엑, 첼리스트 송영훈과 협연하고 있다. /김경은 기자
서울바로크합주단은 "매우 우아하면서도 바로크 음악의 진수를 잘 표현했다"는 워싱턴포스트의 호평을 받은 지난 1987년 미국 워싱턴 연주회를 시작으로 23년간 3개 대륙, 19개 나라, 71개 도시를 순회하며 그동안 총 98회의 해외공연을 펼쳤다. 그동안 합주단의 해외 투어여행 이동거리는 39만876㎞로 지구를 10바퀴 도는 것과 맞먹는다. 특히 클래식 음악의 본고장인 유럽에 초창기부터 적극적으로 진출해서 독일·프랑스·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에서 공연을 가졌다.

이들이 연주한 장소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상주 공연장에서 동남아시아의 밀림 지역까지 전 세계에 걸쳐 있다. 김민 음악감독은 "1991년 말레이시아 쿠칭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 원시림이 펼쳐진 풍경을 보며 연주했던 때"를, 비올리스트 양혜순씨는 "한 마을에 6가구가 전부인 크로아티아 루베니차에서 돌로 된 유적을 직접 밟고 올라가 해 질 녘 산꼭대기에서 펼친 연주"를 가장 인상적인 순간으로 꼽았다.

서울바로크합주단이 해외 초청연주를 고집하는 건 반세기 전에 국내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클래식 음악을 지금은 한국 연주단체가 본고장에 되돌려 줄 때라고 믿기 때문이다. 합주단 이름은 '바로크'이지만 과감하게 '현대음악'을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꾸미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이날 2부에서 서울바로크합주단이 현악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들려준 베토벤의 현악 4중주 작품 59-3 '라주모프스키'는 100회째 해외공연의 백미였다. 단원들은 하나가 된 활 놀림으로 원곡인 현악 4중주보다 풍성하면서도 원작만큼이나 날렵한 선율을 선사해서 성당을 가득 메운 1000여명 청중의 진심 어린 박수를 이끌어냈다. 김민 음악감독은 "100회 해외공연 달성은 우리에게 달콤한 채찍"이라며 "세계 무대에서 더 확고하게 자리잡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으니 200회, 300회까지 계속 이어가 일취월장한 한국 음악이 세계에 울려 퍼지게 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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