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0.06.18 15:42

현대연극의 거장 피터 브룩 작품 초연
실화 바탕 아프리카 종파 분쟁의 기록
다국적 배우 7명 출연…영어 대사 진행
[이브닝신문/OSEN=김미경 기자] “이건 염주알입니다. 기도할 때 쓰는. 이 안에 제 어린시절 기억이 가득 담겼죠. 이걸 보면 되새기게 됩니다. 인생에는 늘 최고의 순간과 최악의 순간이 동시에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이 작은 구슬에서 시기와 혐오, 살인과 학살이 다 나옵니다. 제 눈으로 직접 봤어요. 이 구슬이 커지고 켜져서 폭탄이 되는 걸.” 현대연극의 표상으로 손꼽히는 영국 연출가 피터 브룩(85)의 작품이 국내에서 첫 선을 보인다. 지난해 파리에서 초연한 연극 ‘11 그리고 12’다. 단순한 무대에서 감정을 배제한 배우들은 묵언에 가까운 대사와 극도로 자제된 움직임으로 브룩이 세상에 전하고자 한 ‘폭력을 거부하고 어떤 타협도 허용하지 않는 관용’을 말한다.
“스승님 떠나시면 기도문 낭송은 12번 할까요, 11번 할까요?”
살아 있는 연극계의 신화, 피터 브룩의 작품 연극 ‘11 그리고 12’가 국내 초연 중이다. 2009년 신작이다. ‘11 그리고 12’란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제목은 기도문을 11번 외울지 12번 외울지를 두고 빚어진 갈등에서 따왔다. 세상 살아가는 데 별로 지장을 주지 않을 것 같은 이 단순한 문제는 1930년대 아프리카 수피교 종파 분쟁의 단초가 된 중요한 사안이었다. 브룩은 이 사소한 논쟁에서 시작된 비극을 고발하고 평화와 화해를 말한다.
작품은 아프리카 말리에서 이슬람 신비주의 종파인 수피교의 다툼에 휘말렸던 실존인물 티에르노 보카의 생애를 그렸다. ‘완벽한 진주’로 불리는 기도문을 11번 낭송하는지 12번 낭송하는지를 두고 종교갈등이 빚어지고, 프랑스 식민지 사업이라는 정치적 목적과 연계되면서 영토의 분할지배로까지 비화된다. 기도문을 12번 외우는 종파의 지도자였던 보카는 폭력과 반목 사이에 있는 두 종파를 화해시키려 했지만, 11번 외우는 지도자 하말라에게 감복해 종파를 전향했다는 이유로 추방당하고 쓸쓸한 죽음을 맞는다.
브룩의 무대미학이 특히 눈길을 끈다. 평소 무대의 빈 공간에 주목, 단순한 아름다움을 중시해왔던 브룩은 이번 작품에서도 일체의 군더더기를 걷어냈다. 공연 중 한 번도 암전이 되지 않는 무대에는 붉은 천이 한 장은 벽에, 한 장은 바닥에 깔려 있다. 그 외에 움직일 수 있는 작은 나무 세 그루, 의자도 됐다가 묘가 되기도 하는 세 개의 나무둥치가 무대장치의 전부다. 맨발로 무대에 선 배우들에 의해 소품은 텅 빈 무대 위를 수시로 옮겨 다니면서, 오로지 텍스트로만 정치와 종교, 인종을 뛰어넘는 관용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꾀하고자 한 연출가의 철학을 대신 전한다.
영국과 미국, 이스라엘, 스페인, 프랑스, 말리 출신의 다국적 배우 7명이 출연한다. 무대 한 켠에 자리잡은 제8의 배우인 악사는 일본 전통악기와 북 등을 펼쳐놓고 곡의 높고 낮음과 리듬의 강약으로 극의 전환에 큰 흐름을 잡는다.
1925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브룩의 60여년에 달하는 연출경력은 현대연극 혁신의 역사다. 세계무대에 소개한 70편의 작품으로 브룩은 단순함을 통해 선명한 메시지를 던지는 순수연극의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20일까지다. 영어 대사로 진행되며 한국어 자막이 제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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