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봉을 물고 태어난 남자

입력 : 2010.05.20 03:19

'지휘名家' 장남 파보 예르비 인터뷰
아버지는 名지휘자 네메 예르비… 동생도 클래식·재즈 넘나들며 이름 떨쳐
"타고난 재능+예술적 환경이 날 만들어"

지휘의 피도 유전되는 걸까. 에리히 클라이버와 카를로스 클라이버(Kleiber), 아르비드 얀손스와 마리스 얀손스(Jansons), 아르맹 조르당과 필립 조르당(Jordan), 한국의 정명훈과 정민까지 음악계에는 유독 부자(父子) 지휘자가 많다.

2대에 걸쳐 3명이 지휘자로 활동하는 예르비 부자에 이르면, 이런 의문은 확신으로 변한다. 에스토니아 출신의 명지휘자 네메 예르비(73)에 이어, 파리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으로 내정된 장남 파보 예르비(48)와 클래식과 재즈, 현대음악을 과감하게 넘나드는 차남 크리스티안 예르비(38)까지 최고의 '지휘 명가(名家)'를 자랑한다.

다음 주 내한하는 지휘자 파보 예르비(왼쪽)와 그의 아버지 네메 예르비(아래 왼쪽), 동생 크리스티안 예르비(아래 오른쪽)는 모두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휘자인‘지휘 명가’다. /빈체로 제공
다음 주 내한하는 지휘자 파보 예르비(왼쪽)와 그의 아버지 네메 예르비(아래 왼쪽), 동생 크리스티안 예르비(아래 오른쪽)는 모두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휘자인‘지휘 명가’다. /빈체로 제공
이 가운데 미국 신시내티 심포니와 독일 프랑크푸르트 방송 교향악단, 프랑스 파리 오케스트라 등 3개국의 오케스트라를 동시에 이끌면서 차세대 거장으로 주목받는 파보 예르비가 한국에 온다. 29일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협연하는 프랑크푸르트 방송 교향악단의 내한공연에 앞서 그를 전화 인터뷰했다.

―당신의 첫 악기는 타악기였다고 들었다.

"4~5세쯤 피아노와 함께 타악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어릴 적 실로폰 독주자로도 활동했고, 10대 시절에는 친구들과 록 밴드를 꾸려서 2년간 드럼을 치기도 했다. 당시에는 블랙 사바스 같은 헤비메탈이나 예스·제네시스의 프로그레시브 록 음악을 주로 연주했다.(웃음)"

―하지만 언제나 꿈은 지휘였을 것 같다.

"어린 시절 나의 우상이자 영웅이었던 아버지의 조기교육 덕분이다. 오케스트라 리허설이 있으면 언제나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가셨고, 단원들과 어떻게 의사소통하는지 지켜볼 수 있었다. 아버지는 아주 오래전부터 나를 지휘자로 만들려고 계획을 짜둔 것이 아닐까."

―1980년 일가족이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당시 에스토니아는 소련에 속했고, 공산 정권은 예술가에게도 모든 걸 간섭하고 제약했다. 아버지는 종교적으로 독실한 작곡가 아르보 패르트의 '크레도(Credo)'를 1979년 직접 초연한 뒤 정치적 후폭풍에 휘말렸고 결국 떠날 수밖에 없었다."

―미국·독일·프랑스의 악단을 동시에 이끌다 보면 정신없을 만큼 바쁠 것 같다.

"한 해 100여 차례는 연주하는 것 같다. 여행과 콘서트로 분주하게 이어지는 삶이 쉽지만은 않지만 얻는 것도 적지 않다. 객원 지휘자로 많은 악단을 지휘하면, 언제나 '제로 상태'에서 시작해야 한다. 일정한 악단과 연속성을 갖고 교감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

왼쪽부터 네메 예르비, 크리스티안 예르비.
왼쪽부터 네메 예르비, 크리스티안 예르비.
―신시내티 심포니를 미국 신흥 명문악단에 올려놓았고, 파리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에도 내정됐다. 지휘자로서 리더십의 비결은 어디 있는가.

"우리 시대에는 오케스트라 단원 하나하나가 클래식 음악의 '전도사' '명예대사' '연합군'이라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또 미국 커티스 음대 시절의 스승 막스 루돌프의 말처럼 '지휘자는 절반은 음악가이지만, 나머지 절반은 연기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연기력의 비밀은 무엇인가.

"연기라는 말에는 100여명에 이르는 단원들이 즉시 이해할 수 있도록 뚜렷하고 분명하게 전달해야 한다는 뜻과 함께, 아주 조금은 동작을 과장해야 한다는 의미도 숨어 있다."

―지휘의 재능도 유전될까.

"음악사에는 대대로 음악가로 종사하는 가문도 적지 않다. 하지만 재능이나 유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환경이다. 부모님이 음악을 전공하지는 않았더라도 음악과 예술을 사랑하고 관심을 보이는 분위기에서 성장한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클래식 음악을 벗할 기회가 자연스럽게 많아진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방송 교향악단 내한공연, 29일 오후 8시 서울 예술의전당, (02)599-5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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