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싱글즈' 주인공 수헌역 박영필
저녁 아홉시 서울 대학로 'S다방' 앞.
지나가는 여성들을 쫓는 음흉한 늑대의 시선. '부티' 나고 '간지' 넘치는 섹시 미녀가 오늘의 작업 타깃.
여자친구와 함께 걸어오는 매력녀 발견. 다가갈까 말까 망설임. 일단 뒤를 쫓기 시작. 식은땀과 초조함. 몇번의 주저 끝에 마침내 경직된 성대의 작동 스위치를 누른다.
"계속 지켜봤는데 그쪽이 마음에 들어서요. 얘기 잠깐 나눌 수 있을까요."
의외로 여자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함께 찻집에 들어가 이야기를 나눴다. 차를 마신 시간은 10분에 불과하다. 어렵게 작업해서 붙잡은 기회지만 여자에게 미련은 없었다. 실전이 아니라 훈련이기 때문이다.
배우 박영필(28)은 뮤지컬 '싱글즈'의 주인공 수헌 역에 캐스팅됐다. 고 장진영이 엄정화 김주혁 이범수와 함께 출연한 영화 '싱글즈'의 뮤지컬 버전이다. 수헌은 영화에서 김주혁이 연기한 캐릭터다.
수헌은 같은 건물에서 일하는 여주인공 나난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먼 발치에서 그녀를 지켜보다 용기를 내 엘리베이터에서 작업 멘트를 날린다.
대학로 길거리 헌팅은 '싱글즈'의 프로듀서인 조행덕 악어컴퍼니 대표가 내린 미션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말을 거는 행위가 어떤 느낌인지 직접 해보라는 거였죠. 그나저나 제 여자친구가 이 사실을 알면 곤란해지는데.(웃음)"
▶배우 엄기준은 내인생의 등대
박영필은 경민대 뮤지컬학과를 졸업하고 뮤지컬 배우가 됐다. 2004년 '지하철 1호선'이 실질적인 그의 데뷔 무대다.
'지하철 1호선'이 끝난 뒤 2005년 뮤지컬 '그리스'에서 파격적으로 주인공 데니 역을 맡았다. 처음 오디션을 보고 배역 발표가 났을 땐 주인공 역할이 아니었다. 2주간의 워크샵이 끝난 뒤 제작감독에게 가서 "데니 역을 꼭 하고 싶다"고 간청했다. 감독도 워크샵 동안 박영필의 숨은 재능과 가능성을 발견한 덕에 흔쾌히 수락했다.
군대 가기 전까지 2년 동안 '그리스'를 계속 했다. 데니 역엔 배우 엄기준도 함께 캐스팅돼 있었다. "기준이 형도 데니역이라는 소리를 듣고 너무 기뻤어요. 제 우상이니까요. 제가 뮤지컬 배우가 된 것도 기준이 형을 보면서 꿈을 키운 덕분이죠. 뮤지컬이라는 걸 처음 본 게 스무살 때였어요. '사랑은 비를 타고'라는 작품인데 그때 기준 형이 거기 출연했거든요. 제 인생의 등대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노래방 '루저', 뮤지컬 배우 되다
2007년에 입대해서 공익근무를 했다. 2009년 3월 제대 뒤 슬럼프가 찾아왔다.
수많은 오디션을 봤다. '헤어스프레이', '김종욱 찾기', '젊음의 행진' 등 가는 곳마다 낙방했다. "제 연기를 스스로 의심하게 됐어요. 이제 난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했죠. 그러다 '스페셜 레터'라는 작품을 하게 됐어요. 주인공은 아니고 조역이었는데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어요. 제가 '그리스' 이후로 한때 주인공만 바라보는 시기가 있었는데 '스페셜 레터'를 하면서 주인공이 아니라도 좋은 배역이 얼마든지 있다는 걸 깨달았죠."
지금은 촉망받는 뮤지컬 배우가 됐지만 어린 시절 박영필은 내성적인 음치였다. 노래방 문화의 아웃사이더, 철저한 루저였다. "노래를 못하는 게 너무 싫었어요. 훈련을 했죠. 베개로 입을 막고 소리를 지르면서 샤우팅을 했어요. 좋아하는 가수 노래도 많이 듣고, 따라했어요. 소리를 계속 지르니까 신기하게도 목이 트이더라고요. 음지에서 고통받는 이땅의 수많은 음치들에게 베개 훈련법을 권하고 싶어요."
박영필은 뮤지컬 '싱글즈'에 대해 "영화 원작에 비해 훨씬 밝고 경쾌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소개했다.
'싱글즈'는 대학로 예술마당에서 올 연말까지 오픈런으로 장기공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