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차게 포효하던 '야수' 쇼팽에서 길을 잃었네

입력 : 2010.04.28 23:45

[리뷰] 베레조프스키 독주회

우렁찬 포효에는 강했지만, 감미로운 속삭임에는 능하지 못했다. 강렬한 터치로 애꿎은 피아노 줄을 종종 끊어먹으며 '건반 위의 사자'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러시아의 명(名)피아니스트 보리스 베레조프스키(Berezovsky)가 지난 27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독주회를 가졌다. 전반부는 리스트, 후반부는 쇼팽의 작품으로 나눴지만, 연주의 명암(明暗)도 따라서 갈리고 말았다.

1·2부에서 뱃노래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들로 각각 문을 여는 구성이 이채로웠다. 1부 첫 곡인 리스트의 '곤돌라를 젓는 여인'에서 베레조프스키는 오른손이 선율을 연주할 때 왼손으로 안정감 있게 배를 젓고, 거꾸로 왼손이 멜로디를 맡으면 오른손으로 눈부실 만큼 유려한 트릴(trill)을 선보였다. 양손 사이에 힘의 차이를 느낄 수 없을 만큼 남다른 균형감을 갖춘 것이야말로 그의 숨은 매력이었다.

마스트미디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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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레조프스키의 폭발력은 리스트의 'B 단조 소나타'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바그너의 관현악을 예시하는 듯한 절정에서 건반으로 커다란 파고(波高)를 그려낸 뒤, 쇼팽 못지않은 눈부신 서정성을 극명하게 대비시켰다. 양손으로 언제든 핵 펀치를 날릴 수 있는 힘을 바탕으로 소리의 여운을 남겨놓은 채 건반에서 과감하게 손을 놓는 순간적 매력도 짜릿했다. 때로는 리스트 자신이 현장에서 즉흥연주를 하는 듯한 두둑한 뱃심으로 난곡(難曲)을 조리할 만큼 자신감도 넘쳤다. 그는 철두철미하게 교과서대로 정리해야 직성이 풀리는 피아니스트 예프게니 키신과 정반대에 서 있는 피아니스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맹렬하게 포효하던 야수는 2부의 쇼팽에서 갑자기 이상(異常) 난조에 빠졌다. 스케르초 3번에서 악보를 펼치더니, 프로그램을 통해 예고했던 '환상 폴로네즈'는 건너뛰었고, 왈츠는 일부 곡목과 순서를 바꿔 연주했다. 무심한 듯이 일부 소절을 가볍게 지나치는 특유의 스타일에도 논쟁의 여지는 남았다. 곡목 변경은 연주자의 권리라는 걸 감안해도, 올해가 쇼팽 탄생 200주년이라는 점에 비춰볼 때 아쉬움은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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