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연극 '오장군의 발톱' 희곡작가 박조열의 삶과 작품

입력 : 2010.04.24 02:58

"전쟁 중에 헤어진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창작의 원동력"
교사에서 군인으로… 군인에서 작가로…
"北가족 사망 충격에… 마무리 못한 작품… 끝내는 게 내 소원"

박조열의 작품은 늘 화제와 논란을 몰고 다녔다. 그가 가진 마지막 바람은 북에 있는
여동생을 만나는 것뿐이다. / 오진규 인턴기자
연극의 거리 명동에 35년 만에 돌아온 작품이 있다. 이달 9일 막을 올린 '오장군의 발톱'이다. 이 연극은 1975년 초연(初演)을 앞두고 있다 개막 직전 '공연 불가(不可)' 결정을 받았다.

왜? 군대와 전쟁을 부정적으로 그렸다는 '혐의'였다. 작품 속에서 시골청년 오장군은 동명이인(同名異人) 앞으로 온 징집영장을 받는다. 순박하게도 그냥 입대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오장군의 발톱'은 1988년 대학로 무대에 올랐다. 이 작품은 원로 희곡작가 박조열(朴祚烈·80)이 썼다. 북한 태생인 그는 12년 동안 국군에 몸담았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왜 군을 겨냥한 희곡을 썼을까.

지주의 아들

박조열의 고향은 함경남도 함주군 하조양면 기회리다. 1930년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대지주(大地主)였다. 어린 시절 별 걱정할 일 없는 그는 문학에 푹 빠졌다. 그가 제일 좋아한 극작가는 버나드 쇼였다.

그의 삶은 1945년 해방 후 공산당 때문에 바뀌었다. '지주의 아들'은 고향에서 쫓겨났다. 함흥고급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홀로서기가 시작됐다. "풀 뜯을 힘도 없었다"던 지주의 아들이 노동자로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박조열은 민주청년동맹 위원장이던 친척에 통사정해 받아낸 엉터리 추천장을 들고 당시 강원도청 소재지가 있던 원산으로 갔다. 도청 공무원 눈에 들어 운 좋게 교원으로 뽑혔다. 원산공업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우리로 얘기하면 국어 과목인데 온통 문학작품만 실려 있죠. 물론 모두 다 사회주의를 선전하는 내용이고요." 그는 6개월 만에 이 학교에서 쫓겨났다. 지주의 아들이었다는 신원조회 결과가 나와서였다.

박조열은 "내가 묵던 이 학교 기숙사는 전쟁 직후 폭격당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며 "쫓겨나지 않았더라면 거기서 죽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1949년 3월 문천군 마전리 오지(奧地)의 중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제가 무엇이 될까요?"

6·25가 터지자 학교에서 대대적인 조직 정비가 시작됐다. "무슨 일 나면 난리 법석을 떨며 긴장감을 조성하는 북한의 전형적인 행태였죠. 사상 강화를 운운하며 희생양을 만드는 식이죠."

박조열이 그 희생양이 됐다. 지주의 아들이라는 출신성분은 두고두고 그의 발목을 잡았다. 가족 같이 대해줬던 동료들이 순식간에 박조열을 외면했다. 파리 목숨과 다름없는 시절이었다.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교원들도 북으로 올라가야 할 상황이 됐다. 출발 전날 박조열은 제자의 아버지인 역술인을 찾아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다. 제자의 부친은 "선생님은 군인이 될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허탈한 웃음을 짓고 자리를 떴다. '내가 군인이 된다니 말도 안 돼. 순 엉터리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동료교사를 만났다. 그는 박조열에게 "인민군 따라가지 말고 도망가자"고 했다.

그날 밤 둘은 산속으로 숨었다. 나흘쯤 지난 후 마을로 내려가자 국군이 보였다. 그는 국군을 따라 고향까지 올라갔다. 모처럼 가족과 재회의 기쁨을 나눴다. 그때만 해도 그게 마지막 만남이 될지 몰랐다.

전선(戰線)

중공군 참전으로 수세로 바뀌자 수십만명의 피란민이 흥남부두로 몰렸다. 박조열도 그중 한명이었다. 배에 오르기 직전 국군 정훈장교의 입대권유에 덜컥 승낙했다. "체면상 거절하기가 곤란했다"는 것이다.

묵호항에서 다시 입대의사를 확인했을 때에도 대답은 같았다. 역시 체면 때문이었다. 전쟁터에서 체면은 소용없었다. 사격훈련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전장으로 투입된 그는 M1 소총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약골이었다.

탈진해 쓰러져 동료들 신세를 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대부분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농민 출신 동료들은 박조열을 전우애로 감쌌다. 그럼에도 그는 남에게 폐를 끼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생각했다.

아들이 돌아오기만 기다리는 어머니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어느새 그는 쉴새 없이 쏟아지는 유탄(流彈)에도 무덤덤해졌다. "신기하게도 사람이 맞는 경우가 드물어 '맞지 않는 총알'이라고 생각하며 지냈다"고 했다.

그랬던 그가 이듬해 5월 박격포 파편에 맞아 쓰러졌다. 박조열은 "그때 남은 전우들이 나 대신 목숨을 바친 것"이라며 "살아남은 내가 좋은 일을 많이 해야 하는데 이대로 죽으면 한 일이 없다고 혼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1953년 휴전 직전 육군에 창설된 부관병과 사관후보생에 지원했다. 피붙이 하나 없이 살아나가야 했던 그로선 생계 자체가 막막했던 때였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25명의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부관학교 교관, 육군본부 행정·계획장교 등을 거쳐 9년 이상 군에 머물렀다. 인사적체로 중위에서 더 이상 진급을 못 하자 1963년 전역했다.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인 '오장군의 발톱' / 외부제공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인 '오장군의 발톱' / 외부제공
문제작

박조열은 군에서 나오자마자 드라마센터 연극아카데미 연구과정에 지원했다. 연극이 좋아서라기보단 젊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서였다. 그는 "민간인으로서 남한 사회와 접촉하는 첫 기회여서 기대감이 컸다"고 말했다.

이 시기에 '관광지대(판문점 명도소송)'라는 첫 작품을 냈다. 미군 대표를 냉소적으로 그린 부분이 문제 됐다. 그는 사상이 불순하다는 이유로 경찰 조사를 받아야 했다.

1965년 내놓은 '토끼와 포수'가 그를 스타덤에 올려놓았다. 당시 유일한 연극상이었던 동아연극상 대상·연기상·희곡상을 휩쓴 것이다. 물론 이 작품도 검열에서 자유롭진 못했다.

소는 공화당의 상징이니 다른 짐승으로 바꾸라는 식이었다. 박조열은 화제작을 계속 내놓았다. 1974년 발표한 '가면과 진실'이라는 작품은 당시로선 드문 토론극 형식이었다.

박정희 대통령과 이후락을 비롯, 북한 외무상 허담, 딘 러스크 전 미 국무장관 등이 등장해 각자가 구상하는 통일방안에 대해 토론하는 내용이다. 대한민국 방송대상을 탄 '땅의 아들들(1981년)'은 방송 중단 위기를 맞기도 했다.

좌익 계열의 항일운동을 다룬 내용이 문제였다. 박조열은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이 방송을 즐겨들었는데 등장인물이 실존하는 줄 알고 '표창방안을 연구하라'고 지시한 것이 알려지자 방송중단 논의가 쏙 들어갔다"고 말했다.

전쟁과 가족

1960~70년대 연극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던 박조열의 희곡은 '조만식은 지금도 살아 있는가(1976년)'를 끝으로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닥치는 대로 라디오나 TV 등 방송극을 쓰느라 여력이 없기도 했지만 이유가 있었다.

그는 "내가 구상하는 내용들은 써봐야 공연될 수 없거나 연극계 관심을 받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앞서면서 움츠러들었다"고 했다. 남북분단에 집착했던 자신의 작품에 대한 연민마저 더해지면서 작품 쓰는 일이 더 힘들어졌다.

그는 "전쟁 때문에 갈라지게 된 혈육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사실상 창작의 원동력이었고 지난날의 정치상황에선 민감한 주제들을 소극(笑劇)처럼 우화적으로 그려내야 했다"고 말했다.

1991년 박조열은 재미교포를 통해 북한에 있는 가족 소식을 들었다. 누이동생 하나만 남고 모두 비참하게 세상을 떴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남북 이산가족에 대해 그리려던 작품도 집필 도중 접었다.

그때 마무리 못한 작품을 완성하는 게 그에게 남은 꿈이다. 박조열은 "'오장군의 발톱'에서도 말하고 싶었던 게 남이든 북이든 통일을 명분으로 전쟁을 일으켜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었다"며 "이념 갈등 때문에 혈육을 잃는 비극이 다시 반복되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해마다 '앞으로 10년 안에 통일될 것 같다'고 되뇌곤 하는데 이렇게 10년, 20년이 지났다"며 "살아생전에 통일을 보고 여동생을 만나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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