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0.04.21 03:07
[역사를 맛보다] [끝] 화가 고흐와 감자
"굶주린 하층민·노동계급에 늘 위로가 되는 양식… 나도 그런 사람이고 싶었네"
19세기, 잘나가는 화가들은 고전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리바이벌'하고 있었다. 성서와 신화 속 주인공을 완벽한 구도에 담아낸 그림이 표준이었던 시대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달라졌다. 산업혁명 시대, 사람들은 기계가 주인이 되어버린 듯한 시대에 불안을 느꼈다. 이때부터 '신경증'이라는 말이 급속히 퍼졌다. 이단적인 화가가 나타났다. 그림 속에는 농부나 어부, 심지어 창녀가 들어 있었고, 공기나 불빛 같은 무정형의 대상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마네·모네·드가 같은 초기 인상주의 화가들이 아카데미즘적 경향을 어느 정도 고수하고 있었던 시대였다. 빛과 색은 바로 빈센트 반 고흐(Gogh·1853~1890)를 통해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광기는 천재의 증명'이라는 속설을 몸으로 입증했던 고흐와 그가 사랑했던 그림 주제를 각종 자료의 도움을 받아 가상대화로 꾸며봤다.

―네덜란드 남부 쥔더르트에서 개혁교회의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당신은 신학자가 되길 꿈꿨고 1879~80년 탄광도시에서 헌신적인 선교활동을 합니다. 그러나 '꽂힌 것'에는 무작정 달려드는 타입이었습니다. 1873년 런던에 머물 때, 하숙집 딸에게 집착했던 건 구질구질했고 1881년에는 사랑을 증명한다며 촛불에 손을 지지기도 합니다. 사촌에게 청혼해 아버지와 거의 의절합니다. 화랑, 서점 점원 등 짧은 직장 생활 중에는 손님이나 주인과 언쟁을 벌였지요.
"나는 이상하게도 남의 감정을 읽는 것에는 익숙하지 못했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 감정만이 나를 사로잡을 뿐이지. 종교도, 성직자인 아버지도, 여자들은 더더욱 날 이해하지 못했지. 아마 그런 시련 때문에 27세부터 단 10년 동안 그렇게 많은 그림을 그려댔는지도 모를 일이오."
―당신은 언제나 동생 테오에게 의존했습니다. 화가 공동체라는 당시 인상주의 화가들의 낭만적 유행에 빠져 있던 당신은 테오가 동료 화가 고갱의 빚을 갚게 하고 1888년 10월 그를 아를르로 초대합니다. 두 사람의 생활비 역시 테오의 몫이었지요. 죽기 4개월 전, '붉은 와인밭'을 400프랑에 판 것이 유일했던 당신은 653통의 편지에서 자주 돈을 재촉합니다.
"우울하고 춥고, 황량했던 시절이었던 유년기, 내 이름이 적힌 묘비(죽은 형의 이름 역시 '빈센트'였다)를 보고 자란 내게 유일하게 내 벗이 되어주었던 것이 바로 테오였소. '모든 남매뿐 아니라 그 자신에게도 언제나 타인이었다'는 내 여동생의 말이 있지 않소. 테오는 내 유일한 지지자이자 친구였지."
―'땀 흘리는 자만이 빵을 먹을 자격이 있다'는 말을 자주 했었던 당신은 동생에게 의지한 삶 때문에 두려움, 불안,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하는데요.
"글쎄. 가셰 박사(가셰 박사의 초상화 속 바로 그 인물)는 내 말년의 발작이 '뜨거운 태양을 너무 쪼이며 물감 냄새를 너무 많이 맡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하던걸."
"나는 이상하게도 남의 감정을 읽는 것에는 익숙하지 못했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 감정만이 나를 사로잡을 뿐이지. 종교도, 성직자인 아버지도, 여자들은 더더욱 날 이해하지 못했지. 아마 그런 시련 때문에 27세부터 단 10년 동안 그렇게 많은 그림을 그려댔는지도 모를 일이오."
―당신은 언제나 동생 테오에게 의존했습니다. 화가 공동체라는 당시 인상주의 화가들의 낭만적 유행에 빠져 있던 당신은 테오가 동료 화가 고갱의 빚을 갚게 하고 1888년 10월 그를 아를르로 초대합니다. 두 사람의 생활비 역시 테오의 몫이었지요. 죽기 4개월 전, '붉은 와인밭'을 400프랑에 판 것이 유일했던 당신은 653통의 편지에서 자주 돈을 재촉합니다.
"우울하고 춥고, 황량했던 시절이었던 유년기, 내 이름이 적힌 묘비(죽은 형의 이름 역시 '빈센트'였다)를 보고 자란 내게 유일하게 내 벗이 되어주었던 것이 바로 테오였소. '모든 남매뿐 아니라 그 자신에게도 언제나 타인이었다'는 내 여동생의 말이 있지 않소. 테오는 내 유일한 지지자이자 친구였지."
―'땀 흘리는 자만이 빵을 먹을 자격이 있다'는 말을 자주 했었던 당신은 동생에게 의지한 삶 때문에 두려움, 불안,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하는데요.
"글쎄. 가셰 박사(가셰 박사의 초상화 속 바로 그 인물)는 내 말년의 발작이 '뜨거운 태양을 너무 쪼이며 물감 냄새를 너무 많이 맡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하던걸."

―또 있습니다. ①'그린 몬스터'라 불리는 알코올 도수 70~80도의 독주, '압상트(Absinthe)' 중독으로 조울증·망상·위장장애에 시달렸다 ②불면증을 치유하기 위해 장뇌를 베개와 침대 밑에 넣어뒀던 것이 장뇌 중독으로 이어져 환각, 신경증을 앓게 됐다 ③간질치료제였던 강심제 디지탈리스(digitalis) 중독으로 신경불안과 정신장애에 시달렸다는 겁니다. 학자들은 '나이트 카페' '별이 빛나는 밤', '사이프러스가 있는 길' 등 후기 작에 노란색이 많은 이유는 약물중독으로 불빛을 노란색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자화상 속 동공이 보통 사람보다 확대되어 있으며, 남프랑스 밝은 빛을 좋아했다는 점을 들어 당신이 녹내장 충격으로 자살했다고 합니다.
"가족도, 사랑하는 동료 고갱도, 날 돌봐주던 가셰 박사도 다 날 떠났지. 그러니 정신이 온전했겠나. 그럼에도 난 마지막 70일 동안 캔버스 70개를 다 그려냈네. 심한 중독증이었다면 불가능한 일 아니겠나."
―선생의 인생에서 발작적이지 않았던 순수의 순간은 언제였나요?
"낸 예술이 문명의 악행을 치유할 수 있다 믿었소. 말똥 냄새 나는 마구간, 옥수수, 감자, 비료, 거름냄새가 나는 들판의 냄새를 맡게 해주고 싶었소. 그런 마음으로 네덜란드 뉘에넨에 머물며 1884년부터 2년간 그린 그림이 바로 '감자 먹는 사람들'이오. 그림을 위해 난 먼저 40명 농부의 얼굴을 관찰하다 제격의 모델을 찾았지. 그는 거칠고 납작한 얼굴에, 이마는 좁고 입술은 두꺼웠으며, 날카롭지 않으면서 뭔가 꽉 찬 느낌을 줬어. 검은 대지를 향해 숙인 그의 이마를 보니, '이마에 땀 흘리는 자 빵을 먹을 자격이 있다'는 말이 생각나더군. 난 손으로 땅을 파서 감자를 캐고, 그 손으로 감자를 접시에 담는, 육체노동을 하는 이들이 작은 보상을 얻는 순간을 그려냈소."
"가족도, 사랑하는 동료 고갱도, 날 돌봐주던 가셰 박사도 다 날 떠났지. 그러니 정신이 온전했겠나. 그럼에도 난 마지막 70일 동안 캔버스 70개를 다 그려냈네. 심한 중독증이었다면 불가능한 일 아니겠나."
―선생의 인생에서 발작적이지 않았던 순수의 순간은 언제였나요?
"낸 예술이 문명의 악행을 치유할 수 있다 믿었소. 말똥 냄새 나는 마구간, 옥수수, 감자, 비료, 거름냄새가 나는 들판의 냄새를 맡게 해주고 싶었소. 그런 마음으로 네덜란드 뉘에넨에 머물며 1884년부터 2년간 그린 그림이 바로 '감자 먹는 사람들'이오. 그림을 위해 난 먼저 40명 농부의 얼굴을 관찰하다 제격의 모델을 찾았지. 그는 거칠고 납작한 얼굴에, 이마는 좁고 입술은 두꺼웠으며, 날카롭지 않으면서 뭔가 꽉 찬 느낌을 줬어. 검은 대지를 향해 숙인 그의 이마를 보니, '이마에 땀 흘리는 자 빵을 먹을 자격이 있다'는 말이 생각나더군. 난 손으로 땅을 파서 감자를 캐고, 그 손으로 감자를 접시에 담는, 육체노동을 하는 이들이 작은 보상을 얻는 순간을 그려냈소."

―감자를 꽤 좋아했나 봅니다.
"'감자바구니' '감자와 나막신' 등 4개의 정물화를 그렸고, 양배추와 감자를 그린 정물도 그렸소. 사실 내 말년, 남프랑스 아를르에 머물 무렵, 나는 챙겨 먹는 습관으로 건강을 회복하려 했었소. 하지만 식당에선 감자 하나 제대로 삶지 못하고, 마카로니는 기름 덩어리였어. 건강이 더 나빠졌지. 감자만 제대로 삶았어도…."
―먹을거리 중에서도 감자에 대해 자주 언급하시네요.
"1만3000년경 안데스에서 야생감자가 재배된 이후, 감자는 인류 속으로 서서히 파고들었지. 스페인 세비야에 남미의 감자가 착륙한 것이 1573년. 감자는 유럽의 굶주린 하층민들을 먹여 살리는 매우 중요한 식품이었지. 하류계급이 노동자로 전환된 산업혁명 이후엔 가정생활도 달라졌네. 1851년 영국 공장노동자의 30%가 여성이었네. 생김새가 볼품없어 악마의 식물로 오해받거나 '돼지나 먹기에 적당하며 이걸 먹은 돼지는 살도 붙지 않는다'고 비난받던 감자는 찌기만 하면 먹을 수 있어 일손과 연료가 부족했던 노동계급엔 최고의 식량이 됐네. 줄기가 비정상적으로 커진 '혹'이어서 보잘것없지만, 늘 위로가 되는 양식. 나도 그런 사람이고 싶었던 건 아닐까."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는 '천국이란 커다란 구운 감자, 함께 먹을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 말했습니다. 당신의 천국은 어떤 맛입니까.
"지상의 내 마지막 양식은 파이프 담배였던 탓에 맛에 대한 기억이 없구먼. 하지만 '당신이 먹은 것을 말해보라.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주겠다'(브리야 사바렝)의 말을 난 이렇게 바꾸겠네. '당신이 먹은 것을 말해보라. 당신의 꿈을 말해주겠다'. 음식에 담긴 건, 맛이 아니라 어쩌면 꿈인지도 모르네."
참고자료
The History and social influence of the Potato, Redcliff N. Salaman
Absinthe the Cocaine of the Nineteenth Century, Doris Lanier
빈센트 반 고흐, 인고 발터
고흐가 되어 고흐의 길을 가다, 노무라 아쓰시
"'감자바구니' '감자와 나막신' 등 4개의 정물화를 그렸고, 양배추와 감자를 그린 정물도 그렸소. 사실 내 말년, 남프랑스 아를르에 머물 무렵, 나는 챙겨 먹는 습관으로 건강을 회복하려 했었소. 하지만 식당에선 감자 하나 제대로 삶지 못하고, 마카로니는 기름 덩어리였어. 건강이 더 나빠졌지. 감자만 제대로 삶았어도…."
―먹을거리 중에서도 감자에 대해 자주 언급하시네요.
"1만3000년경 안데스에서 야생감자가 재배된 이후, 감자는 인류 속으로 서서히 파고들었지. 스페인 세비야에 남미의 감자가 착륙한 것이 1573년. 감자는 유럽의 굶주린 하층민들을 먹여 살리는 매우 중요한 식품이었지. 하류계급이 노동자로 전환된 산업혁명 이후엔 가정생활도 달라졌네. 1851년 영국 공장노동자의 30%가 여성이었네. 생김새가 볼품없어 악마의 식물로 오해받거나 '돼지나 먹기에 적당하며 이걸 먹은 돼지는 살도 붙지 않는다'고 비난받던 감자는 찌기만 하면 먹을 수 있어 일손과 연료가 부족했던 노동계급엔 최고의 식량이 됐네. 줄기가 비정상적으로 커진 '혹'이어서 보잘것없지만, 늘 위로가 되는 양식. 나도 그런 사람이고 싶었던 건 아닐까."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는 '천국이란 커다란 구운 감자, 함께 먹을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 말했습니다. 당신의 천국은 어떤 맛입니까.
"지상의 내 마지막 양식은 파이프 담배였던 탓에 맛에 대한 기억이 없구먼. 하지만 '당신이 먹은 것을 말해보라.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주겠다'(브리야 사바렝)의 말을 난 이렇게 바꾸겠네. '당신이 먹은 것을 말해보라. 당신의 꿈을 말해주겠다'. 음식에 담긴 건, 맛이 아니라 어쩌면 꿈인지도 모르네."
참고자료
The History and social influence of the Potato, Redcliff N. Salaman
Absinthe the Cocaine of the Nineteenth Century, Doris Lanier
빈센트 반 고흐, 인고 발터
고흐가 되어 고흐의 길을 가다, 노무라 아쓰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