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자 악보가 내 음악에 빛을 주었죠"

입력 : 2010.04.20 02:43

시각장애인으로는 첫 비올라 전공 정미영씨
점자악보 만들어 준 선생님들에 보은의 연주

"실력이 별로라 창피하지만 음악을 할 수 있게 도와준 점역사(點譯士) 선생님들께 감사한 마음을 담아 연주했어요."

지난 15일 오후 서울 관악구 봉천동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 내 20㎡짜리 음악실. 정미영(鄭美英·21·시각장애 1급)씨가 비올라를 연주하자 감미로운 선율이 실내를 채웠다.

눈을 감고 감상하는 모습도 보였고, 눈물을 찍어내는 사람도 있었다. 실수도 잦고 어설픈 연주였지만 관객들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손뼉을 쳤다. 서승희(30)씨는 "우리가 번역한 악보로 공부해 연주하는 모습을 처음 봤다"며 "그동안 고생한 것을 한꺼번에 보상받은 느낌"이라 했다.

이날 연주는 정씨가 자신을 위해 악보를 점자로 만들어 준 16명의 음악점역사들을 위해 마련한 자리다. 음악점역사는 악보를 분석하고 해석해 이를 음악점자규정에 맞게 점자로 번역하는 사람들이다. 정씨는 "음악점역사 선생님들이 만든 점자 악보가 없었다면 내가 음악을 전공할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라 했다.

15일 서울 관악구 봉천동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시각장애인 비올리스트 정미영씨가 자신을 위해 악보를 점자로 만들어 준 음악점역사들을 위해 연주를 하고 있다. /오진규 인턴기자
15일 서울 관악구 봉천동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시각장애인 비올리스트 정미영씨가 자신을 위해 악보를 점자로 만들어 준 음악점역사들을 위해 연주를 하고 있다. /오진규 인턴기자
정씨는 선천성 녹내장으로 네 살 때 시력을 잃었다. 세상이 새까맣던 그에게 유일한 장난감은 멜로디언과 하모니카였다. 인천맹학교 초등부에서는 취미활동으로 바이올린을 배웠다. 자원봉사로 강의 오는 선생님이 들려주는 음악을 따라 연주했고, 어머니(47)가 귓가에 불러주는 '도레미파…' 계이름을 따라 더듬더듬 활을 켰다.

맹학교 중등부에 들어간 정씨는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한 선생님이 '소질이 있는데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해 볼 생각이 없냐'고 묻는 거예요. '나에게도 이런 기회가 오는구나' 하고 가슴이 뛰었죠."

예고 진학을 위해 바이올린보다 경쟁이 덜한 비올라를 택했고, 1년 동안 '슈베르트의 비올라 콘체르토 1악장'만 연습했다. 악보 하나 없이 귓가에 들리는 음악을 따라 무조건 외우며 연습을 거듭했다.

천신만고 끝에 덕원예고에 입학했지만, 비장애인과의 경쟁은 녹록지 않았다. 교과서부터 문제였다. 정씨는 교과서를 점자로 만들어 주는 곳을 찾다가 악보도 점자로 만들어 주는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을 알게 됐다.

학교에서 연습곡으로 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점역을 부탁해 받아본 정씨는 점자 악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정씨는 "처음 본 점자악보에는 내가 이제껏 듣지 못했던 음악적 기호들이 가득했다"며 "연주 도중에 모르는 게 있으면 몇번이고 점역사에게 전화로 물어보며 겨우 진도를 나갈 수 있었다"고 했다. 예전에는 무작정 음을 듣고 외웠지만 점자 악보를 구한 후 점자를 손으로 몇번이고 반복해서 읽고 연습하면서 속도가 빨라졌다.

이은혜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 음악점역실 소장은 "음악점역은 글자와 달리 오선지를 그대로 옮겨 그리는 작업이 아니다"며 "전체적 곡 흐름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시각장애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점역사가 악보를 해석해 점자 악보를 만든다"고 했다. 그래서 악보 한 페이지를 점역하면 3~4장의 점자 악보가 나온다. 간단한 연습곡을 점역하는 데 보통 2주일, 오케스트라 곡처럼 복잡한 것은 두 달 넘게 걸린다.

정미영씨는 작년 한세대학교 관현악과에 입학했다. 시각장애인으로는 전국 최초로 대학에서 비올라를 전공하며 학교 오케스트라 활동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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