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지역 공영방송국들은 파괴된 연주회장 대신 가정에서 음악을 감상할 수 있게 하려는 취지에서 각자 방송교향악단과 합창단, 재즈 밴드 등을 창단했고, 그중 몇몇은 일개 방송국 소속 악단이 아닌 세계적인 수준의 단체로 성장했다. 그 가운데에는 슈투트가르트 방송교향악단도 있었다. 현재는 남서독일 방송국으로 통합된 남독일 방송국(SDR)에 의해 종전 직후인 1945년에 창단된 이래 꾸준히 음악적으로 성장했고 탄탄한 실력을 인정받아왔다. 방송교향악단답게 이 악단은 한편으로는 고전-낭만파 교향악에 대한 모범적인 해석을 위해 노력해왔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20?21세기의 음악 및 흔히 연주되지 않는 작곡가들과 작품들을 소개하는 데도 힘을 쏟았다. 1960년에만 해도 RSO 슈투트가르트는 500편이 넘는 작품들을 초연했다.
그러나 실력으로는 유럽 내의 어느 악단과 견주어도 뒤질 것 없는 악단이지만, 이 오케스트라가 그다지 개성 있는, 혹은 요즘 흔히 쓰는 표현으로 존재감 있는 악단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탄탄하다고는 하지만 독일의 다른 방송악단들도 그만큼은 탄탄했고, 실험적이었다고는 하지만 다른 방송악단들도 그만큼은 실험적이었다. 전성기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전설적인 첼리비다케가 그들의 상임이었다는 것은 첼리의 연주회를 직접 본 것을 생애 최고의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애호가의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축복이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첼리비다케 이후 마리너, 겔메티, 프레트르를 거치는 동안 이 악단은 그저 그런 악단이었다고 비난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특성 없고 타성에 젖어 있었다.
한 사람의 지휘자
이른바 정격연주 혹은 시대악기 연주가 일반적인 청중에게 널리 알려진 지도 벌써 많은 세월이 흘렀다. 음악 작품을 그 작품이 탄생하던 시대, 지역의 연주 관습에 맞게 연주하려는 이러한 운동은 그동안 그 자체도 많이 변모해왔고, 그 운동에 참여하거나 그 운동을 이끄는 사람들도 많이 변해왔다.
사재를 털어 창단한 악단으로 분투하며 청중에게 호소하던 ‘비주류’ 지휘자 가운데 그래도 (시쳇말로) ‘잘나가는’ 이들은 객원 지휘자로서 ‘주류’ 오케스트라의 연주회 무대에 진출했다. 아르농쿠르는 빈필과 베를린필, 콘세르트헤보라는 세계 제일의 악단들이 우러러 모시는 지휘자가 되었다. ‘주류 악단’의 상임 지휘자가 되는 이도 나왔다. 가디너는 귄터 반트가 물러난 NDR 교향악단을 맡았다. 그러나 가디너의 주류 진출과 NDR의 파격적 인사는 실패였다. 그는 4년을 못 채우고 별다른 성과도, 소리 소문도 없이 물러났다. 그리고 그는 여태껏 왜 함부르크를 떠났는지에 대해 입을 연 적이 없다.
이 분야에서 노링턴은 인정받는 지휘자 중 한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스타’ 지휘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그가 가디너나 아르농쿠르만큼의 인기를 누리는 지휘자는 아니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이 지휘자와 악단이 만남으로써 21세기 초 관현악 연주계의 가장 독특한 현상이 탄생하리라고 누가 예상했을까? 슈투트가르트 악단 내부에서는 좀 더 인기 지휘자를 모시자는 목소리 혹은 NDR 악단의 전철을 밟지 말자는 우려도 충분히 있었을 법하고, 노링턴으로서는 자신이 창단한 악단을 이끄는 것과 기존의 대규모 악단, 그것도 관료주의가 뼛속에 스며 있는 독일에서 방송교향악단을 맡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음악적으로도 RSO 슈투트가르트와의 만남은 노링턴에게 커다란 도전이었고 실험이었다. 연주자들과 청중이 과연 자신의 꿈꾸는 소리와 음악에 동의할지 의문이었다.
오케스트라는 외형적으로 바뀌어갔다. 제1, 제2 바이올린은 서로 붙어 있던 미국식 배치에서 날개처럼 좌우로 분리된 옛 유럽식으로 바뀌었고, 콘트라베이스는 빈필처럼 무대 뒤의 중앙에, 그리고 금관과 팀파니는 옆쪽에 배치되었다. 금관은 작품에 따라서는 코팅되지 않은 재질의 피스톤 없는 내추럴 악기들이 투입되었고, 쇠가죽을 씌운 소구경 팀파니가 동원되었다.
우려는 잠시였다. 1980년대 이후 예술적 발전이 다소 정체되어 있던 그 악단은 1998년 노링턴이 취임한 이래, 그의 손에서 놀라운 변신을 꾀했고 또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당대의 연주 관습에 기반을 둔 이른바 정격연주 기법 및 시대악기와 근대적인 교향악단이라는 조직을 접목시킴으로써 유일무이한 소리를 창출해냈다. 언론은 RSO 슈투트가르트의 이러한 변화에 앞 다투어 찬사를 보냈으며 성공적인 결합에 의해 탄생된 그들의 소리에 ‘슈투트가르트 사운드’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난 지금, 노링턴은 슈투트가르트에서의 작업을 통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75세를 기념해 SWR에서 이루어진 라디오 인터뷰에서 노링턴은 이렇게 털어놓은 바 있다. “이른바 고음악 운동을 처음 시작했을 때, 우리는 모든 것이 악기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지요. 지금은 생각이 다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악기들이 몇 세기가 흐르는 동안 그렇게까지 많이 변화한 것은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변한 것은 그 악기들이 연주되는 주법입니다.
근대악기에 고악기의 연주 기법을 적용하면 훨씬 더 ‘예스럽게’ 들립니다.” 금관은 작품에 따라 옛 악기를 사용했지만 슈투트가르트 악단의 현악 주자들은 바로크 악기나 활을 쓰지도, 근대 악기에 거트현을 걸어놓지도 않았다. 슈투트가르트 사운드의 핵심은 바로 그 옛 기법으로 연주하는 근대악기, 다시 말해서 비브라토를 뺀 짧은 프레이즈의 현 소리에 있었다.
노링턴에 와서 고음악 운동은 ‘시대악기 연주’가 아닌 ‘역사적?시대적 지식이 바탕이 된 연주’로 진화했다. 이들이 시즌 기획, 혹은 장기적인 기획을 세워서 연주한 베토벤과 모차르트, 슈만, 멘델스존, 브람스, 브루크너, 베를리오즈, 말러의 교향악 작품들의 연주회 실황 음반은 청중과 언론,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노링턴의 시도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평론가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사운드’의 가치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다.
이들이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해 연주회를 가진다는 것은 매우 반가운 소식이다. 이 소리를 현장에서 한번 들어본 애호가라면 그 새로운 자극을 잊을 수 없다. 이들의 내한에 맞춰 서면 인터뷰가 성사되었다. 그 내용을 이 자리에 소개한다. 필자는 좀 더 심도 있는 대답을 원했지만, 그렇다고 노링턴의 답변이 전혀 성의가 없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Artview(이하 A) 오늘날 사람들은 RSO 슈투트가르트의 소리를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슈투트가르트 사운드’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정작 당신은 스스로 어떤 낱말로 그 사운드를 표현하시겠습니까?
Roger Norrington(이하 RN) 이른바 ‘슈투트가르트 사운드’는 물론 19세기의 실제 소리입니다. 아니면 적어도 그것이 우리의 목표이지요. 그 소리는 연주자의 수와 무대 배치, 템포, 제스처, 아티큘레이션, 사운드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도 비브라토 없는 오케스트라의 깨끗하고 순결한 음이 가장 강력한 특징이지요.
A 선생과 슈투트가르트 악단의 ‘슈투트가르트 사운드’는 한국에서도 이미 잘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지금까지는 오로지 음반을 통해서였습니다. 연주회를 찾는 많은 사람들은 대개 이렇게 물을 것 같습니다. ‘그 사운드는 실제 연주회장에서 어떻게 울릴까? CD를 들을 때와 완전히 다를까?’ 그렇게 묻는 한국의 애호가들에게 어떤 말씀을 해주시겠습니까? 선생 자신은 실제 연주회와 음반의 차이를 직접 경험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RN 연주회장과 음반은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의 녹음은 모두 ‘실황’으로 제작되었고, 아마 한국에서도 똑같은 흥미진진한 사운드를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A ‘슈투트가르트 사운드’라는 음향적 특성은 처음부터 의식적으로 목표로 하신 겁니까, 아니면 그저 시대악기 연주 방식과 현대 독일의 방송교향악단 체계를 결합하는 시도를 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부산물입니까? 선생은 언젠가 〈차이트〉지(誌)와의 인터뷰에서 ‘아름다움은 음악을 만드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부산물이지 목표가 아니다’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만….
RN 순수한 음은 처음부터 오케스트라 배치며 템포와 같은 역사적 접근의 자연스러운 목표입니다. 순수한 음과 프레이즈로 잘 연주하면 그 결과는 아름다울 겁니다. 당신의 얼굴이 맑고 깨끗하다면 화장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A 선생은 근대 오케스트라(물론 당신의 슈투트가르트 악단은 예외이겠지만)의 비브라토가 1920년대의 재즈 연주 방식에서 온 것이라고 진단하신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미국적이고 비정통적인 연주 방식이 어떻게 아무런 저항 없이 그렇게 빨리 미국 내에서뿐만 아니라 전 유럽의 클래식 음악계에 확신될 수 있었을까요? 재즈 비브라토 확산의 역사를 어떻게 재구성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RN 클래식 오케스트라에서 비브라토를 쓰는 관행은 재즈가 대중화됨과 동시에 시작되었습니다. 재즈에서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요. 당시 새로 생겨난 엔진 자동차의 영구적인 진동에서 또 다른 무의식적인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고요. 당시 자동차 소리는 흥미로운 새로운 소리였고 정말 빠르게 전 세계에 퍼져나갔지요. 문제는 그것이 브람스나 드보르자크가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바로 빈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비브라토를 쓰지 않고 버텼던 이유입니다.
RN 흥미로운 질문이군요! 대부분의 20세기 음악은 산업화를 반영하고 있지요. 아마도 이미 스트라빈스키에서부터 시작되었을 겁니다. 대규모 연주회장, 대편성 오케스트라, 대규모 정치적 사조(공산주의와 파시즘, 자본주의), 이 모든 것이 웅장하고 때로는 느린 연주에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작곡가들은 그들의 이상적인 창작물을 가지고 산업주의의 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려고 했지요.
A 미완성의 걸작들(예를 들어 베토벤의 10번 교향곡과 슈베르트의 교향곡 7번, 브루크너 교향곡 9번, 말러 교향곡 10번 그리고 엘가 교향곡 3번 등)을 완성하거나 최소한 연주가 가능한 상태로 만들려는 지난 수십 년 동안의 시도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언젠가 사람들이 선생의 연주회에서 앤소니 페인이 완성한 엘가의 교향곡 3번을 들을 수 있는 날이 오겠습니까?
RN 나는 재구성 작업에 특별히 매력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좋은 작품들은 이미 어디에나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번 시즌에는 브루크너 교향곡 9번의 완성판을 연주해서 한 번 변화를 주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A RSO 슈투트가르트는 선생 이외에도 두 명의 지휘자와 지속적으로 함께 작업을 해오고 있습니다. 안드레이 보레이코와 페터 외트뵈슈가 그들이지요. 이 두 분은 RSO 슈투트가르트의 연간 프로그램에서 각각 러시아 음악과 현대음악을 주로 맡고 있는 것 같은데요. 두 사람과 음악이나 오케스트라, 그리고 슈투트가르트 악단의 발전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를 나누시는 편입니까? 상임 지휘자로서 이 두 동료가 연주할 곡목을 스스로 선택하십니까, 아니면 그들이 알아서 프로그램을 짜도록 놔두십니까? 그리고 덧붙이자면, 현대음악은 선생께 ‘들어가서는 안 되는 땅(terra incognita)’으로 남아 있습니까, 아니면 현대음악 연주에도 관심이 있으십니까? 저는 선생이 쇤베르크나 스트라빈스키에 대해서도 이미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만…
RN 나는 슈투트가르트에서 다른 이들이 하는 것을 - 혹은 사실대로 말하자면 - 그들이 연주하는 방식을 통제하려고 작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음악은 스스로 연주해볼 작정은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휘자로서 내 직업의 일부이니까요. 그리고 지휘자로 활동해오는 동안 벌써 50곡이 넘는 작품의 세계 초연을 지휘했습니다.
A 한국의 연주단체로부터 객원 지휘를 해달라는 초청을 받으신다면 거기에 응해서 시대악기 연주 방식에 대한 당신의 견해와 통찰을 더 나누어줄 의향이 있으십니까?
RN 한국의 오케스트라와 작업해보는 것은 아주 흥미로운 일이 되겠군요. 그들이 새로운 아이디어에 마음이 열려 있다면 말입니다. 일본과 중국에서는 이미 초청을 받은 적이 있고, 앞으로 몇 년 동안은 도쿄의 NHK 교향악단과 정기적으로 작업을 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질문지를 보내고 난 다음 날, 필자는 2011년부터 활동할 슈투트가르트 방송교향악단의 새로운 상임 지휘자가 내정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프랑스인 지휘자 스테판 드네브였다. 현재 스코틀랜드 무대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는 드네브는 루셀을 비롯한 프랑스 작곡가들의 작품으로 인정을 받은 지휘자로서 시대악기 연주에도 근대악기를 옛 주법으로 연주하는 것과도 거리가 먼, 전형적인 현대 교향악단의 지휘자다. 이 말은 곧 ‘슈투트가르트 사운드’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리라는 말과 같다. 이 악단은 여전히 슈투트가르트의 악단이겠지만, ‘슈투트가르트 사운드’는 영원히 그들의 것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첼리비다케가 지휘봉을 내려놓으면서 첼리의 슈투트가르트 사운드가 사라졌듯이, 노링턴이 긴 팔로 휘젓는 맨손 지휘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될 때 노링턴의 슈투트가르트 사운드도 사라질 것이다. 무엇보다도 아쉬운 것은 이번 공연이 이들의 첫 내한 공연인 동시에 마지막 내한 공연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하지만 노링턴의 실험과 음악 여행이 멈춘 것은 아니다. 그는 오는 2011년에 슈투트가르트를 떠남과 동시에 독일의 이웃 나라 스위스의 취리히 실내 오케스트라를 맡는다. 게다가 그는 우리 나이로 77세에 피부암과 뇌종양을 앓은 병력이 있는 사람답지 않게 정력적이기도 하다. 머지않아 우리 귀에는 ‘취리히 사운드’라는 찬사가 들려올 것이다. 아니, 그곳이 굳이 취리히가 아니라도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어느 곳에서든 로저 노링턴은 자신만의 소리를 찾아갈 것이고, 그것이 그저 ‘노링턴 사운드’가 아닌 어느 단체, 어느 도시의 소리로 살아가도록 전파하는 일을 계속해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