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치다 지휘 쉽지 않네요"… "지휘 한다고 피아노 놓지 마라"

입력 : 2010.04.07 23:25

김선욱, 닮고싶은 巨匠 아슈케나지에게 길을 묻다

스위스의 휴양도시 인터라켄. 옛 카지노를 개조한 공연장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의 3악장이 서서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휘봉에 따라 흐르는 목관은 따뜻했고 현악은 깊기 그지없었다. 유럽 각국의 젊은 연주자들로 구성된 유럽연합청소년오케스트라(EUYO)의 리허설이었다. 형제애와 우애를 노래한 이 곡처럼 유럽연합 정신에 어울리는 곡도 없을 듯싶었다. 지휘자인 아슈케나지는 까다로운 대목을 수차례 반복하다가 정확하게 맞아떨어지자, 아이처럼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만세를 불렀다. 무대 뒤에서 리허설을 지켜보고 있던 한국의 피아니스트 김선욱(21)도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조선일보 창간 90주년을 기념하여 마련된 다음달 영국 명문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내한공연에서 지휘자와 협연자로 다시 만난다. 세계 유수의 콩쿠르에 두루 입상한 피아니스트이면서 지휘자의 길도 걷고 있는 아슈케나지는 어쩌면 김선욱에게 빼닮고 싶은 본보기 같은 음악가다. 다음 달 협연을 앞두고 청년 김선욱이 거장 아슈케나지에게 음악의 길을 물었다.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법칙이란 없다네. 자신의 직감을 믿게나.”피아니스트 김선욱(왼쪽)이 지휘자 겸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에게 고민을 털어놓자 거장
은 이렇게 답했다. 두 사람은 다음 달 조선일보 창간 90주년 기념으로 열리는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내한공연에서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한다. / 英공연기획사 해리슨 패럿 제공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법칙이란 없다네. 자신의 직감을 믿게나.”피아니스트 김선욱(왼쪽)이 지휘자 겸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에게 고민을 털어놓자 거장 은 이렇게 답했다. 두 사람은 다음 달 조선일보 창간 90주년 기념으로 열리는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내한공연에서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한다. / 英공연기획사 해리슨 패럿 제공
▲김선욱=지난해 9월 영국에서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을 당신의 지휘로 처음 연주했다. 그 음악회를 앞두고 너무나 초조하고 불안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슈케나지=첫 연주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수백 번은 연주해본 것처럼 깊이가 있고 아름다웠다.

▲김=당신은 10대 후반부터 국제 콩쿠르에서 좋은 성적을 냈는데 참가 계기가 궁금하다.

▲아=당시 러시아는 공산주의 체제였고, 당국에서 출전하는 연주자까지 직접 지명했다. 쇼팽 콩쿠르 때는 2차 예선까지 꽤 잘했는데, 마지막 협주곡을 잘 못 쳤다. (웃음) 차이콥스키 콩쿠르는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출전하지 않으면 경력이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김=정부에서 그렇게 세세한 구석까지 통제했나.

▲아=당국에 '저당' 잡힌 신세나 다름없었다. 우리에겐 사상이나 여행의 자유가 없었다.

▲김=콩쿠르를 통해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는가.

▲아=같은 대회에 참가하는 연주자들은 경쟁자가 아니라 동료이자 협력자다. 쇼팽 콩쿠르 1위였던 아담 라바셰비치(폴란드)와 푸총(중국)은 지금도 함께 연주하거나 연락을 나눈다. 하지만 무대에 설 만큼 충분한 경험이나 레퍼토리 없이 너무 어린 나이에 입상하는 건 비극이기도 하다. 입상이 아니라 무대가 우선이라는 걸 잊어선 안 된다.

▲김=위기를 어떻게 극복했나.

▲아=소련 시절의 간섭이나 규제는 불행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행운이기도 했다. 무대 연주 횟수까지 일일이 정해줬지만, 덕분에 천천히 공부하면서 서서히 경력을 쌓을 수 있었다.

▲김=지휘는 어떻게 관심을 가졌나.

▲아=5~6세 때 어머니와 함께 볼쇼이 극장에 가서 처음 발레를 보았다. 남들은 무대 위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내 관심은 무대 밑의 오케스트라였다. 휴식시간에도 어떻게 연습하는지 보려고 피트(pit)로 달려갔으니까.

▲김=하지만 막상 지휘자가 되기란 쉽지 않다.

▲아=영국으로 망명했을 때 장인이 지역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활동하고 계셨다. 그분의 권유로 처음 그 악단을 지휘했고 조금씩 기회를 늘려나갔다. 너무 많은 기대를 하면 그만큼 좌절하기도 쉽다. 또 지휘를 한다고 해서 결코 피아노를 놓아선 안 된다.

▲김=지휘자에게 필요한 자질은 무엇인가.

▲아=연주자나 성악가, 지휘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사람들이다. 마음이 이끄는 방향으로 나아가야지 악단도 설득할 수 있다.

▲김=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나.

▲아=1970년대 후반에 이 악단을 처음 지휘했다. 당시 내 지휘 실력은 지금보다 훨씬 엉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연주회 끝나고 단원들을 초대해서 샴페인 파티를 가졌다. 내 지휘를 견디며 연주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웃음)

▲김=이번 내한공연에서 소록도에 찾아가 가수 조용필씨와 자선음악회를 여는데.

▲아=내 친구이자 악단 후원자인 로더미어 여사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가는 것이다. 한국 노래를 어떻게 지휘해야 할지는 아직 잘 모르지만, 아리랑의 악보도 구해서 보고 있다.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내한공연, 5월 3일 예술의전당(피아노 김선욱), 4일(바이올린 정경화), 6일 고양아람누리(피아노 김선욱), (02) 599-5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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