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난 인터뷰] 서울시향 상임작곡가 진은숙

입력 : 2010.02.17 22:48

"작곡은 착해서만은 안돼… 속에 괴물 키워야"

진은숙씨는“예술 작품의 진정한 가치가 드러나기 위해서는 때때로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서울시향 제공
세계 초연(初演) 4곡, 아시아 초연 36곡, 한국 초연 22곡. 지난 2006년 4월 시작한 서울시향의 현대음악 시리즈 '아르스 노바(새로운 예술)'는 풍성한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지금까지 16회의 연주회를 진행하는 동안 티켓 판매량이 최다 714장, 최저 138장에 그칠 만큼 극심한 흥행 부진에 시달리기도 했다. 서울시향의 상임작곡가로 '아르스 노바'의 기획자이자 진행자인 진은숙(49)에 대한 질문은 이 간극에서 출발했다.

―현대음악 연주회는 좋게 말해서 '궂은 일 한다'지만, 나쁘게 말하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아닐까.

"반드시 대중적인 것이 좋다는 등식에 찬성할 수 없다. 특히 예술작품이라면 시간이 걸려야 가치를 인정받는 경우도 있다. 당장 성과를 내려고 표를 사서 뿌리거나 초대권을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인기 장르'에 무작정 매달릴 수만도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대형운동장에서 마이크 대고 노래하면서 오페라를 공연하는 것이 대중에게 다가가는 것일까. 무슨 분야든 깊이 파고드는 사람은 소수이게 마련이다. 그런 취향까지 넉넉히 받아줄 수 있어야 한 나라의 문화적 저력이 드러난다."

―지난 4년간 꾸준히 진행할 수 있는 동력은 무엇이었나.

"나는 알고 보면 대단히 집요한 사람이다(웃음). 도토리묵을 만들려고 포댓자루를 몇 개씩 들고 가서 도토리를 땄다. 그리고 사나흘간 허리 끊어지도록 갈아서 1인분도 안 되는 두부 두 모 분량만 얻은 적도 있다. 진정 원하는 일은 포기를 모른다. 처음 1~2년은 프로그램 구성부터 연주자 섭외까지 '맨땅에 헤딩'하느라 정말 죽는 줄 알았다."

―서울시향의 상임작곡가인데 하는 일은 기획자에 가깝다는 지적도 있다.

"내 곡을 연주하는 일에는 욕심이 별로 없다. 다른 현대음악 작품도 좋은 곡이 얼마나 많은데. 청중들이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얻어갔으면 좋겠다."

―지난해 영국 최고의 음악제인 BBC 프롬스(Proms)에서 첼로 협주곡을 초연했고, 미국과 일본에서는 생황 협주곡이 첫선을 보였다. '세계에서 가장 바쁜 작곡가'인 것 같다.

"지금 당장은 바쁘다고 해도 작품 위촉만으로는 먹고살기 쉽지 않다. 그래서 많은 작곡가가 취업하거나 강단에 서지만, 일을 갖고 나면 곡을 쓸 수 없다. 전업 작곡가로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삶에서 많은 것을 양보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다."

―지난해 발표한 생황 협주곡은 동양의 악기를 사용한 첫 작품이었다. 하지만 때로는 유럽 작곡가보다 더 유럽적이라는 평도 있다.

"만약 한국이나 동양음악을 작품에 녹였다고 선전하면 성공하기 더 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음악적 내용이나 본질과는 별반 관계없는 것이다. 아시아 음악을 반영하더라도 자연스럽게 하고 싶다."

―작곡가로서 가장 큰 위기는 언제였나.

"유럽으로 유학 가서 작곡가 리게티(Ligeti)에게서 공부할 때였다. 언제나 새로운 것을 쓰라고 닦달하셨지만, 그게 어디 매번 써지나. 하도 괴로워서 보드카를 잔뜩 마시고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날 공원에서 얼어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상상한 적도 있었다. 작곡은 착하기만 해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작곡가는 마음속에 괴물이 하나씩은 들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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