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하고 위트 있는 프로필로 관객을 즐겁게

'이 한 장의 명반'(현암사) 저자 안동림씨는 저서에 경력을 딱 세 줄만 표기합니다. '청주대 영문학과 교수 역임' 외에 저서와 역서 이름만 소개하는 것이지요. 조금 더 길게 쓸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물어봤지만, "내가 실제 한 일보다 더 많은 걸 자랑하거나 평가받고 싶은 마음은 없다"며 손사래를 칩니다.
하지만 인터넷과 블로그 시대를 맞아 재야의 고수(高手)들이 출판 시장에 저자로 활발하게 진입하면서, 프로필을 쓰는 방식도 훨씬 다양해졌습니다. "조향사(調香師)는 전 세계에서 온 수많은 향기를 맡으면서 세계를 여행한다"는 멋진 직업 소개부터 "그의 목표는 마음에 말을 거는 화가들을 500명 정도 찾아 소개하는 것"이라는 개인적 바람까지 저자의 친절한 프로필은 책을 읽는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합니다.
이에 비하면 공연장 안내 책자에 실린 연주자의 약력은 획일적이며 불친절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어느 학교를 졸업하고, 어떤 경연대회에서 입상한 뒤, 무슨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고, 어디에서 리사이틀을 가졌으며, 몇 장의 음반을 발표했다"는 형식은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눈썰미 좋은 관객들은 차갑기 그지없는 프로필에서도 많은 힌트를 찾아냅니다. 베를린 필이나 빈 필과 자주 협연했다면 유럽이 주무대요, 뉴욕 필이나 시카고 심포니와 호흡을 맞춘다면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한다는 걸 눈치 챌 수 있는 것이지요. 같은 악단과의 협연이라도 음악감독을 맡고 있는 지휘자와 협연했는지, 객원 지휘자와 협연했는지에 따라서 무게감이 달라집니다. 또 정기연주회 무대에 올랐는지, 야외콘서트나 대중음악회에 섰는지도 중요합니다. 연주 자체에 품질 차이가 생기는 것은 아니겠지만, 연주회의 성격을 가늠할 수 있는 잣대가 되지요. 연주자가 사사(師事)한 스승을 통해서는 학맥(學脈)을 짚어볼 수 있습니다. 즐겨 연주하는 곡목을 명기한 경우에는 고전파와 낭만주의, 현대음악 중 어느 쪽에 강한지 알 수 있고, 어느 나라 작품에 강점을 지니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관객이 음악 전공자나 전문적 감식안을 갖춘 애호가가 아닌 한, 지금 같은 프로필은 '암호문' 같은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지나치게 건조하고 딱딱한 경력 나열 대신 인간적 향취를 느낄 수 있는 구절을 하나씩 넣어보는 건 어떨까요. 피아니스트 손열음은 "그녀는 열렬한 농구 팬이며 강원도 원주의 홈팀을 응원한다"는 문장을 경력 말미에 살짝 넣었습니다. 타카치 현악4중주단의 제2바이올리니스트 카로이 슈란츠는 "내 아내도 같은 오케스트라의 단원이었는데 바로 내 뒷자리에 앉았다. 내가 발레리나의 다리를 쳐다볼 때마다 머리 뒤에서 날카로운 시선을 느끼곤 했다"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소개합니다. 이런 프로필은 공연장을 찾는, 또 하나의 쏠쏠한 재미가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