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기행' 과 '나비부인'
23세의 청년 작가 김승옥이 단편 〈무진기행〉을 발표한 것이 1964년입니다. 서울에서 '백 좋고 돈 많은 과부'를 만나 처가의 도움으로 승진을 앞둔 주인공은 고향 무진으로 잠시 내려옵니다. 주인공은 "서울에서의 실패로부터 도망해야 할 때거나 하여튼 무언가 새 출발이 필요할 때" 언제나 무진행(行)을 택했다고 돌이켜봅니다.
안개와 잠, 무기력과 도피의 공간인 무진에서 주인공은 서울에서 성악을 전공한 음악교사 하인숙을 만납니다. 우연히 합석한 술자리에서 하인숙은 주변의 청에 〈목포의 눈물〉을 부릅니다. 주인공은 "그 여자가 부르는 〈목포의 눈물〉에는 작부들이 부르는 그것에서 들을 수 있는 것과 같은 꺾임이 없었고, 대체로 유행가를 살려주는 목소리의 갈라짐이 없었고, 흔히 유행가가 내용으로 하는 청승맞음이 없었다"고 기억합니다. '없었고'를 활용한 이 문장의 리듬에 청년 김승옥의 감수성이 그대로 묻어납니다.

그녀는 이렇게 그의 마음속으로 들어왔고, 소설 속 리듬의 향연은 곧장 공감각의 잔치로 바뀝니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반짝이는 별들이라고 느낀 나의 감각은 왜 그렇게 뒤죽박죽이었을까." 밤길을 걸으며 남녀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선 넌지시 팔을 잡습니다.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이 소설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순간이 이 대목입니다. 이 오페라는 《라 보엠》《토스카》와 함께 지금도 상시 공연되는 푸치니의 걸작이지요. 바닷가에서 하인숙은 《나비부인》의 아리아 〈어떤 갠 날〉을 부르고, 주인공은 "흐린 날엔 사람들은 헤어지지 말기로 하자. 손을 내밀고 그 손을 잡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가까이 가까이 좀 더 가까이 끌어당겨 주기로 하자"고 되뇝니다.
둘은 그 바닷가에서 사랑을 나누지만, 상경을 바라는 아내의 전보 한 통에 주인공은 하인숙에게 쓰던 편지를 찢어버리고 버스에 몸을 싣습니다. 하인숙은 버림받은 여인 '나비부인'이 되고, 주인공은 떠나는 남자 '핀커튼'이 되는 것입니다.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서 나는, 어디쯤에선가 길가에 세워진 하얀 팻말을 보았다. 거기에는 선명한 검은 글씨로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서울로 떠나던 버스 안에서 주인공이 느꼈던 감정은 어쩌면 나비부인을 버렸던 핀커튼의 심정 그대로였을지 모릅니다. 무진의 하인숙도 나가사키의 나비부인처럼 언덕 끝에서 하염없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푸치니 《나비부인》 11~12일 오후 7시 30분 대구오페라하우스, (053)656-30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