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금(奚琴)을 세상이란 무대 위로 끌고 나오다

입력 : 2009.11.26 03:14

10년간 '해금 플러스' 이끌며
'해금 열풍' 일으킨 강은일
독집 음반만 3장 발표…
재즈에서 영화음악까지 거침없이 영역 넓혀

“국악고에 들어간 후 가야금을 하고 싶었는데 반에서 20등까지 모두 가야금을 선택
하더라고요. 전 21등이었거든요.”해금 연주자 강은일은 웃으며“해금은 가진 것이
적기에 오히려 가능성은 무한했다”고 말했다./한국문화예술기획 제공

거문고나 아쟁이 걸쭉한 탁주(濁酒)라면, 해금은 해말간 청주(淸酒) 같은 국악기다. 새침데기나 깍쟁이처럼 카랑카랑한 비음(鼻音) 섞인 고음의 매력에 빠져, 해금을 배우는 아마추어 동호인만 3만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해금 열풍'의 선두에 서 있는 음악인이 연주자 강은일(42)씨다. 독집 음반만 3장을 발표하고 재즈와 영화음악까지 거침없이 영역을 넓히면서 대표적인 '차세대 국악인'으로 꼽힌다. 그가 이끌고 있는 연주단체인 '해금 플러스'가 올해로 창단 10주년을 맞았다.

강은일은 '해금 늦깎이'다. 어릴 적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운 그는 시창(視唱)과 청음(聽音) 시험으로 국립국악고에 입학 후에 해금을 처음 접했다. "해금은 단 두 줄이어서 다소 유치하고 촌스럽고 초라해 보이기도 했죠. 솔직히 가야금은 성적이 안 됐고, 무용은 어릴 적부터 연습해야 했고, 대금은 폐활량이 벅찼어요."

그는 매일 아침 6시에 등교해서 밤 11시까지 학교 연습실을 지키는 '악바리 생활'을 3년간 반복했다. 그는 "멋모르고 시작했지만 끝을 봐야겠다는 오기가 있었다"고 말했다.

강은일은 국립국악고와 한양대 음대를 졸업하고 KBS 국악관현악단 단원과 경기도립국악단 수석연주자 등 '정석 코스'를 그대로 밟았다. 강씨는 "대학 4년 내내 전액 장학금을 받으면서 한 학기에 학생회비 3000원씩만 냈다"고 했다.

하지만 9년간의 국악관현악단 단원 생활을 마치고 1998년 독주자로 독립하자, 따사롭던 햇살이 갑자기 세찬 비바람으로 바뀌는 것 같았다고 했다. "국악계 안에서 강은일이지, 밖으로 나가 보니 누구도 찾아주지도, 알아주지도 않았어요. 허허벌판에서 벌거벗고 찬바람 맞으며 홀로 서 있는 것만 같았죠."

그는 식사 약속 한번 제대로 잡지 못하고, 집안에만 틀어박혀 수개월간 눈물로 지새우기도 했다. 결혼식장에서 홍대 앞 클럽까지 가리지 않고 무대를 찾아다녔고, 맥주 몇 잔으로 출연료를 대신하기도 부지기수(不知其數)였다. 하지만 그는 "추우면 당장 옷부터 입어야지 마냥 떨거나 창피해할 수만은 없었다"고 말했다.

2000년 자신의 이름을 처음 내건 공연이 매진을 이루고, 2002년 발표한 첫 음반 〈오래된 미래〉가 2만여장의 판매고를 올리면서 그는 뚜벅뚜벅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연주자로서 강은일이 성장한 지난 10년은, 해금이 폭발적인 사랑을 받은 기간과 겹친다.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휴대가 편한 데다 궁중음악부터 무속(巫俗)음악까지 어디에도 빠지지 않는 '약방의 감초' 같은 악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약점도 적지 않다.

"산조(散調)는 가야금, 정악(正樂)은 대금처럼 다른 악기들은 너무나 풍부하고 뚜렷한 전통을 지니고 있었어요. 하지만 해금은 그렇지 않기에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야 했어요."

전통의 부재(不在)는 거꾸로 퓨전(fusion)이나 크로스오버(crossover) 작업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기회가 됐다. 그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음악에 참여하고, 인도의 전통 악기 시타르와 어울리며, 프리 뮤직(Free Music)이나 재즈와 협연하며 해금의 경계를 실험해왔다.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교본을 개발하고, 창작 음악에도 욕심이 많은 강은일은 "해금이라는 악기를 통해 어디까지 대화를 나눌 수 있는가를 확인하고 싶다"고 말했다.

▶강은일 해금 플러스 10주년 기념 공연, 12월 1일 오후 7시 30분 국립국악원 예악당, (02)786-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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