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日)서 '김치파워'로 성공… 이젠 1년 중 반(半)은 한국서 노래"

입력 : 2009.11.23 06:13

'엔카의 여왕' 김연자 22년 만에 한국서 활동 재개
2001년 평양 공연 도중 묻지 말라며 열차에 태워
함흥 도착하니 김정일이 있어…
北옷감으로 한복 해 입었더니 金위원장 "남조선이 더 잘만들어"

22년 만에 국내 무대로 복귀하는 가수 김연자. 그는“일본은 성인 가요시장에도 여러
종류의 음악이 살아 숨쉬는데 한국은 한 가지 유행하는 스타일에 너무 휩쓸리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고 말했다./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지난 88년 서울 올림픽을 찬미한 노래 '아침의 나라에서'를 들고 일본으로 떠나 일본 최고의 엔카 가수로 20여년을 살아왔던 김연자(50)가 돌아온다. 22년 만에 국내 앨범을 발표하기 위해 녹음작업에 한창인 그는 "요즘 유행하는 경쾌하고 리듬감 넘치는 트로트가 담길 것"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12월 발매 예정. "더 이상 지체하면 한국 팬들이 저를 잊어버릴 것 같았어요. 앞으로는 1년 중 절반은 한국에서 노래할 겁니다."

김연자는 일본 오리콘 차트 엔카 부문에서 15번이나 1위를 했다. 그 해 최고의 가수들만 모이는 NHK '홍백가합전'에도 세 차례 출연했다. 그는 "일본 사람이 갖고 있지 않은 한국인 특유의 목소리 때문에 주목받을 수 있었다"고 했다. " '김치파워'라고나 할까요? 우리는 매운 김치가 없으면 밥을 잘 못 먹지만 일본 사람들은 자극이 적은 음식을 좋아하잖아요. 그래서 근본적으로 다른 목소리가 나오는 것 같아요. 매운 음식으로 거칠고 강하게 단련된 제 목청이 더 호소력 짙은 노래를 들려준다는 말입니다."

그의 일본 도전이 단번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70년대 후반 18세 어린 나이로 홀로 일본 시장 문을 두드렸지만 쓴맛을 봐야 했다. 하지만 그때 그는 평생의 반려자를 만났다. 유명 재즈 오케스트라 '클리어 톤즈' 악단장인 18세 연상의 교포 2세 김호식씨를 만나 연애를 시작했던 것. 두 사람은 82년 결혼했다. 88년 이후 그가 일본 음악계에 연착륙할 수 있었던 첫 번째 비결은 안정된 가정이었다. "든든한 시댁이 있고, 남편의 악단과 함께 공연을 다니니까 무서울 게 없었죠. 그래도 초기에는 많이 힘들었어요. 술만 마시면 여권 들고 집에 간다고 밖에 나갔다가 엉엉 울며 되돌아왔죠. 외국에서 활동하면 '가수 김연자'가 아니라 '한국 가수 김연자'가 되기 때문에 늘 조심스러웠어요."

김연자는 엔카 가수로 해외 공연도 많이 다녔다. 쿠바, 브라질, 프랑스, 베트남 등을 거쳤다. 그는 "엔카, 스탠더드 팝, 성악, 판소리, 재즈 등 모든 종류의 노래를 할 수 있기 때문에 해외에서도 높은 호응을 얻는다"며 "모두 연습의 결과"라고 했다.

그가 꼽는 가장 인상적인 공연은 바로 2001년과 2002년 가졌던 북한 무대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2001년에 원래 평양 공연을 3회 하기로 하고 북한에 갔어요. 그런데 첫 회 공연을 마치고 난 뒤, 갑자기 간부들이 저희 숙소로 와서 짐을 다 싸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더니 '묻거나 따지지 말라'면서 열차에 태우더군요. 그게 '위원장 전용 열차'였나 봐요. 좋은 침대도 있고 시설이 엄청 좋더라고요. 밤새 달려 도착한 곳이 바로 함흥이었어요. 거기서 공연을 하라는 거죠. 그런데 저하고 남편만 또 차를 태워 또 어디로 이동을 시키더군요. 엄청나게 큰 대문이 있는 해변가 집 앞에 내렸더니 문이 열리면서 김 위원장이 나왔어요. 전 외마디 비명을 질렀죠. '와! 진짜다'라고요."

그는 "김 위원장은 당시 제게 '이미자, 패티 김, 미소라 히바리(일본의 전설적 엔카 가수)의 좋은 점만 본받은 것 같다'고 평가했다"며 "또 제가 우리 옛 가요를 묶어 발표한 메들리 앨범에 대해 '아버지(김일성)와의 추억이 담겨있다. 82년도쯤 같이 들었다'고 회상했다"고 했다.

"북한 옷감으로 한복을 해 입고 김 위원장을 만난 적도 있었어요. '예쁘다'는 칭찬이 나올 줄 알았더니 이러더군요. '우리보다 남조선이 더 잘 만들죠'. 뜻밖이었어요. 북한 주민 10만 여명이 만드는 집체극 '아리랑' 리허설을 관람한 것도 잊을 수 없습니다. 당시 객석에는 저를 포함해 불과 30여명밖에 없었거든요."

그는 "김 위원장이 계속 북한 공연을 오라고 했는데 일본 내 반북 감정이 심해 항의도 많이 오고 '북한 가수'처럼 소문이 나 더 이상 갈 수 없었다"고 말했다. "당시 저희는 무료 공연이라고 생각하고 북한에 갔는데 김 위원장이 남편에게 돈봉투를 줬어요. 그런데 거기 얼마가 들었는지는 아직도 안 가르쳐주네요. 죽기 전에는 알 수 있겠죠?"

광주 출신인 그는 유년 시절부터 빼어난 노래 실력을 선보였고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 서울에 올라와 가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제 인생에서 청춘이 없다는 건 아쉽지만 늘 가수로 살게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다시 시작될 국내 활동에 가장 든든한 힘이 돼줄 사람들은 선배들이다. "송대관 선배님이 '쨍 하고 해 뜰 날' 녹음할 때 제가 코러스였잖아요. 그때는 둘 다 같은 소속사였고 또 완전 무명이었는데. 하하."

돌아온 김연자를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무대는 12월 23·24일 서울 홍은동 그랜드 힐튼 호텔 컨벤션홀에서 열리는 '2009 김연자 크리스마스 디너쇼'. 그는 "요즘 한국에서 사랑받는 최신 트로트 가요도 들려주겠다"며 주먹 쥔 오른 팔을 들었다. 공연 문의 1544―2498


 

가수 김연자씨가 새로 내는 앨범과 디녀쇼 계획에 대해 이야기한다.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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