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를 너머 이타의 언덕으로…

입력 : 2009.11.20 09:52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김복희

새 정부 들어 문화계에서 가시적으로 가장 많은 혜택을 입은 분야는 어디일까? 다소 논란의 여지는 있겠으나, 아마 무용계가 아닐까 한다. 충분히 대우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장르이고, 국제화에도 유리한 장르가 무용임으로 그걸 특혜라고 칠 수는 없겠다.

그 가시적인 증거를 꼽자면, 우선 국립현대무용단 창단을 목전에 두고 있으며 극장 역사상 초유의 ‘무용 중심 극장’이 곧 선을 보일 계획이다. 서울 대학로에 있는 현 아르코극장이 무용 중심 극장으로 전환한다는 이야기는 이미 기정사실로 굳어져 운영 방안에 대한 자문회의도 열리고 있다.

이런 저런 무용계 경사의 중심에 김복희 한국무용협회 이사장이 있다. 어쨌든 한국무용협회는 한국무용, 현대무용, 발레를 아우르는 구심점으로 이사장은 선출직이다. 김 이사장은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도 친분이 깊어 일각에서는 무용계 권력이 너무 그 쪽으로 쏠린다는 지적도 받고 있는 게 사실이다. 김 이사장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핵심적인 양대 권력을 다 쥐고 있는 셈이다. 이런 걸 보면 오해(?)도 받을 만하다 싶은데, 김 이사장으로부터 솔직한 심정을 듣는 것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오해도 받는 것 같은데요.

“저도 눈치는 채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그 동안 무용은 다른 장르에 비해 소외됐던 분야입니다. 최근에야 발레의 인기가 상승하면서 관객층도 넓어지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무용과 관련한 일은 무용계 가족 잔치에 머무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스갯소리인데, 음악가는 결혼하면 남편 데리고 공연장을 찾지만 무용은 그렇지 않아요. 저는 볼만한 게 없기 때문이라고 자조합니다만 씁쓸하긴 하지요. 때문에 무용계의 이런 분위기를 일신해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구심점이 필요합니다. 그런 생각으로 일을 하다 보니 오해도 받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사장이면서 예술위원회 위원으로도 일하게 됐군요.

“맞습니다. 지난해 위원회에 들어갈 때는 고민도 참 많았지요. 하지만 이유는 매한가지였습니다. 무용이 더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뭉쳐야 하며 그러기 위해 각자 개인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협회의 주요 행사 중 ‘대한민국무용대상’이 있는데, 운영위원으로 무용계 각 단체장 13명이 운영위원으로 참여합니다. 이런 구조를 권력집중이라고 하면 곤란한 얘기지요.”

따끈 따근한 현안으로 말길을 돌렸다. 우선 국립현대무용단의 창단에 관한 것부터 물었다. 국립현대무용단은 이미 내년 예산을 확보한 사업으로 곧 실체가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이미 무용분야에서는 발레와 한국무용이 국립단체를 확보했다. 김 이사장은 현대무용 전공으로 오래 전부터 국립현대무용단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다.

-언제부터 말이 나온 건가요. 일정한 형식미를 갖춘 고전 텍스트가 존재하는 한국무용과 발레에 비해 무용가의 개성을 중시하는 현대무용의 특성상 일정한 지향점을 가져야 하는 ‘국립단체’의 속성과 잘 맞지 않는 것 같은데요.

“우선 국립현대무용단 건의 발단부터 말씀드리면, 모든 걸 저 혼자 주도적으로 제안한 것은 아닙니다. 현대무용계의 선배들도 누차 강조했던 일이지요. 다만 새 정부 들어서 보다 깊은 논의가 시작된 것입니다. 지적하신대로 개성을 강조하는 현대무용의 특성상 예술감독이 자신의 예술에 치중하면 단체의 미션과 충돌할 수 있습니다. 그걸 피하기 위해서는 프로젝트별로 안무가를 초청해 제작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좋은 생각입니다. 아르코극장이 무용 중심 극장으로 탈바꿈하는 것도 무용계로서는 큰 경사지요?

“물론입니다. 무용계의 모든 분야에서 환영을 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하루 이틀에 만족해야 했던 공연이 장기공연으로 전환할 수도 있고, 무용에 대한 집중도를 높여 저변을 넓히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무용 전용이 아닌, 중심 극장이라는 것을 아신다면 특혜 시비라고 말 할 수는 없지요. 더불어 말씀 드리면 이런 것을 계기로 무용이 다른 장르, 특히 연극과는 문화 정책면에서 동등한 입지를 확보했다고 자부합니다.”

딱딱한 현안 이야기는 이쯤에서 접고 ‘무용가 김복희’에 관한 이야기로 분위기를 바꿨다. 현재 한양대 예술대학장인 김 이사장은 중진 현대무용가로도 명성이 높다. 김 이사장은 자신의 이름을 딴 무용단과 가림다무용단을 이끌고 있다.

-무용은 언제부터 시작했나요? 몇 년이 됐습니까?

“여섯 살 때부터이니 강산이 다섯 번, 아니 거의 여섯 번 쯤 바뀌었겠군요. 유치원 때 아주 예쁜 무용 선생님에게 반해 무용을 했어요. 집안에 꽤 이름 있는 무용가도 있어 분위기는 무르익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반대가 커서 곤란을 겪었는데, 고2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무용가의 길이 열렸습니다. 아이러니지만 이화여대 진학도 그래서 가능했습니다.”

-장안의 우스개소리처럼 “나 이대 나온 여자야!”이거군요. 막강한 이대 무용과 몇 회입니까?

“1966년 입학, 4회 졸업생입니다. 나중에 저와 무용단을 함께 한 김화숙 원광대 교수는 한 회 밑이었는데, 제가 늑막염으로 1년 휴학을 해 같은 학년을 다녔지요.”

-그 유명한 ‘김복희 김화숙 무용단’은 언제 활동했습니까? 평가도 괜찮았지요?

“1971년부터 1990년까지 거의 20년을 동고동락했지요. 창단 작품은 스크리야빈의 음악을 사용한 ‘법열의 시’로 지금의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했습니다. 반응이 좋아 데뷔는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습니다.”

-무용으로 치면 유인촌 장관과는 스승과 제자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만나게 됐나요?

“1981년 '징깽맨이의 편지'를 지금의 아르코극장인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공연할 때입니다. 본인 스스로 직접 찾아와 무용을 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지요. 그 이후 6-7년을 제 옆에서 무용을 같이 했습니다. 때론 듀엣으로 출연하기도 했지요. 그 당시에는 계속 무용을 할 것처럼 꽤 열심히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현대무용의 한국화에 심혈을 기울이며 문제작을 많이 냈던 김복희 김화숙 무용단은 1990년 둘의 결별로 문을 닫았다. 각자 대학에 적을 두게 되자 제자 그룹으로 이루어진 단원들 간의 문제가 원인이었던 것. 이후 김화숙 씨는 무용 교육으로, 김 이사장은 무용가의 길로 나섰다.

-육완순 씨의 히트작인 무용극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도 출연했지요? 어떤 역이었습니까?

“1973년 유다 역으로 처음 출연했고, 막달라 마리아 역도 더러 했지요. 유다 역이 강렬하며 인상적이었다고 평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연극평론을 하시며 무용 대본과 의상도 하시던 구히서 선생도 이 역할에 매우 흡족해 했는데, 아마 그게 인연이 돼 80년대 후반 김복희 김화숙 무용단을 위한 대본 작업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유별난 취미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것인지요?

“꼭두 인형을 모으는 취미가 있는 데, 그동안 한 2백50여 점을 모았습니다. 상여의 꼭두가 많은 편인데 다양한 표정이 너무 맘에 들어 계속 수집하게 됐습니다. 박물관을 만들 생각으로 경기도 포천으로 이사를 했는데 그게 여의치 않아 아직은 저 혼자만 감상하고 있습니다.”

주변 사람의 전언으로, 김 이사장의 부지런함은 극성스러울 정도라고 한다. 바쁜 대외 활동에도 불구하고 거의 빠지지 않고 학교에 나가 무용수로서 자신을 단련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고 한다. 무용계의 산적한 현안이 술술 풀리는 것도 이런 지극정성에 대한 보상이 아닐까! 권력이 그냥 오는 건 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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