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짐이었던 5·18… 한껏 풀어내니 시원섭섭"

입력 : 2009.11.03 05:55   |   수정 : 2009.11.03 08:43

제3회 차범석희곡상 '푸르른 날에' 정경진씨
태권도 사범·다방 DJ… 다양한 삶 끝에 극작가로
"강펀치 맞은 듯 얼떨떨 감동 주는 글 쓰고 싶다"

차범석희곡상 트로피. 조각가 최만린의 작품이다. 최만린은“차범석 선생의 곧은 정신세계를 새싹 느낌으로 표현했다”고 말했다. 재료는 청동.
지난 8월 31일 공모 마감한 제3회 차범석희곡상에는 장막 희곡 부문에 71편, 뮤지컬 극본 부문에 38편이 접수됐다. '차범석희곡상은 희곡의 저수지'라는 연극계의 평처럼, 이름난 기성 극작가들도 여럿 참여했다. 연출가 임영웅, 극작가 노경식·윤대성이 맡은 희곡 심사에서는 정경진의 《푸르른 날에》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연극평론가 유민영, 김윤철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박명성 신시컴퍼니 대표가 심사한 뮤지컬 극본에서는 당선작이 나오지 않았다.

전남 목포에 사는 극작가는 고양이들 밥을 주다가 당선 소식을 들었다. 소감을 묻자 "꿈꾸는 기분"이라고 했다. 지난 30일 서울 대학로에서 만난 정경진(44)은 "생애 최고의 낭보였다"며 "(당선을) 무르자고 할까 봐, 지난 일주일 동안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화들짝 놀랐다"고 했다.

"대한민국의 대단한 극작가들이 다 나올 텐데 속된 말로 '맞짱' 한번 뜨고 싶었어요. 결국 내가 이겼네요. 그런데 어쩐 일인지 강펀치를 맞은 기분입니다. 여태 못 헤어나고 있어요."

제3회 차범석희곡상 당선작 《푸르른 날에》를 쓴 정경진은 지난해 전남일보 신춘문예(희곡 부문)로 등단했다. 하지만 2004년부터 소설·인형극·마당극 등 여러 장르의 공모에서 10회나 수상할 만큼 '솜씨 있는 이야기꾼'이다. 그의 연극 《홍어》(연출 김성노)는 4~8일 대학로에서 공연된다.

"공모에 낙방하면 출품작에 들인 공력과 상금 규모에 따라 우울증이 와요. 짧으면 30초, 길어도 5분인데 상금 3000만원짜리 차범석희곡상에 미끄러졌다면 후유증이 오래갔을 겁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푸르른 날에》에는 극작가의 경험이 포개져 있다. 정경진은 5·18 당시 중3이었고 목포역에서 열린 시위에 참여했다. 그는 "작가로서 5·18은 오랫동안 마음의 짐이었다"며 "용서와 화해, 희망의 이야기로 풀긴 했는데 시원섭섭하다"고 말했다.

올해 차범석희곡상에 당선된 정경진은“‘언제 사람 될래?’걱정하면서도 꾸준히 격려해 주시다 지난 2월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난다”고 했다./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올해 차범석희곡상에 당선된 정경진은“‘언제 사람 될래?’걱정하면서도 꾸준히 격려해 주시다 지난 2월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난다”고 했다./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이 극작가는 전력(前歷)이 다양하다. 고교 졸업 후 태권도장에서 4년간 사범(3단)으로 일했고 음악다방 DJ와 레스토랑의 피아노 연주 아르바이트도 했다. "부모님한테 손 벌려 카페를 3번 열었는데 다 말아먹는 등 '대형 사고'도 여러 번 쳤다"며 웃었다.

그러나 그 실패와 경험도 작품의 밑천이다. 그래서일까, 늦게 등단했지만 정경진은 낙관적이다. 그는 "철이 없는 것일 수도 있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며 "하루 8시간씩 건강하게 글 쓰고 바라는 바를 조금씩 이루고 있으니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는 글이 막힐 때는 집 근처 유달산에 오르는데 반드시 마스크를 챙긴다고 했다. 마스크를 쓴 채 대사를 웅얼거리면서 작품을 고치는 습관 때문이다. 이번 당선작은 7년 전 소설로 먼저 쓴 것이었다. "서랍 안에 장편소설 셋, 장막희곡이 두 편 있다"는 정경진은 "요즘 세습광대 이야기를 쓰고 있는데, 이번에 받은 상금으로 국악 공부를 좀 더 해야겠다"고 했다.

《푸르른 날에》에서 주요 공간은 암자와 찻집, 둘뿐이다. 한국불교교육대학을 졸업한 극작가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2년간 다도(茶道)를 배웠다. "차는 따는 시기에 따라 향·맛·색이 다 달라요. 인간의 마음도 일종의 구도(求道)를 통해 용서도 하고 사랑으로 승화할 수 있습니다."

《산불》과 《전원일기》의 극작가 차범석도 목포 출신이다. 정경진은 "이름만으로도 존재감을 주는 분이라 아직도 내 상이 아닌 것 같다"며 "한 계단 올라선 기분이지만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더 절제되고 조화로우며 감동을 주는 글쓰기를 하겠다"고 말했다.

당선작 '푸르른 날에'는
피해자와 가해자, 그리고 求道

차밭이 보이는 암자에서 수행 중인 승려 여산(오민호)은 딸이자 '조카'였던 운화의 결혼 소식을 듣는다. 그의 기억은 30년 전 전남대 학생 시절로 돌아간다. 당시 오민호의 연인은 전통찻집 주인 윤정혜였고, 정혜의 동생 기준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와중에 전남도청에서 숨진다. 혹독한 고문 후유증을 겪던 민호는 출가(出家)하고, 민호와 정혜 사이에 생긴 딸 운화를 친형 진호가 거두게 된다. 극작가 정경진은 "신파적이지만 극적 효과를 위해 불가피한 장치였다"며 "쓰면서 여러 번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제3회 차범석희곡상 당선작 '푸르른 날에'를 쓴 정경진씨를 서울 대학로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녀에게 수상 소감을 물었다.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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