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동아줄, 바로 당신에게 있다

입력 : 2009.11.02 13:18

극단 컬티즌 '뱃사람'

지난 7년간의 컬티즌 극단의 성과와 역할은 주목할 만하다. 젊은 층을 타깃으로 한 작품이 주류를 이루는 대학로에서 컬티즌은 대세를 역류하며 매년 중장년층을 주요 관객으로 삼은 나름의 색깔있는 작품을 꾸준히 소개해왔다. 이호재, 윤소정, 전무송 등 중년층의 베테랑 연기자들이 주요 배우로 출연했던 작품들로 컬티즌은 지금까지 '졸업'(2003)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어'(2004) '세상을 편력하는 두 기사 이야기'(2005) '넘버'(2006) '언덕을 넘어서 가자'(2007) '쿠크박사의 정원'(2008) 등을 선보였다.

이 작품들은 수시로 동아연극상 후보작으로 오를 만큼 공연 실적을 냈고, 이러한 꾸준한 공연 성과 덕분에 이제 컬티즌은 관객들로 하여금 작품 선별력과 완성도에서 탄탄한 신뢰를 얻고 있다. 컬티즌의 1년 공력은 오로지 한 작품에 온전히 쏟아지기 때문에 이들의 공연 준비는 매우 철저하고 매진하는 기세도 무섭다.

컬티즌의 올해 선택은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삼십대의 아일랜드 작가 코너 맥퍼슨의 작품 '뱃사람'이다. 국내에서도 코너 맥퍼슨은 '거기' '더블린 캐롤' '샤이닝 시티' 등을 통해 이미 꽤 알려졌다. 그는 젊은 작가의 시선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작품 속에 깊이 있는 인생의 통찰력을 담아낸다. '뱃사람'은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구원’이라는 명제를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크리스마스 이브 아침, 더블린 지역의 한 지하방에서 연극은 시작된다. 앞을 보지 못하는 괴팍한 술꾼 리차드(이호재 분), 희망 없는 삶의 연속인 리차드의 동생 샤키(이남희 분), 리차드의 술 친구 아이반(이대연 분)과 니키(이명호 분), 그리고 낯선 남자 록하르트(정동환 분)까지 등장인물이 차례로 지하방에 모여든다. 특별히 파티가 아니어도 늘 술에 기대어 살아가는 이들의 남루한 일상은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축복스러운 분위기와 겹쳐지면서 술이라는 마취제가 혹시 절망이 아니라 희망과 기쁨의 무엇일 수도 있겠다는 착각을 하게 한다. 이처럼 흥겨운 이브의 분위기는 지하방에서조차 절망스러운 일상을 잊게 만들어준다.

이 마취된 듯한 몽환적인 분위기는 록하르트의 등장으로 깨진다. 샤키를 향해 집요하게 악마적 기운을 풍기던 록하르트는 결국 샤키와 운명을 건 카드 게임을 한다. 게임에서 샤키가 지면 록하르트를 따라 죽음의 세계로 떠나기로 한 것. 마치 정해진 운명처럼 게임에서 진 샤키가 록하르트를 따라나서려는 순간, 아이반이 뒤늦게 자신의 카드를 확인하면서 갑자기 승자가 뒤바뀐다. 아이반이 뜬금없이 게임의 승자가 되어버리자 약속대로 록하르트는 깨끗이 샤키를 떠난다. 악몽을 꾼 듯한 이브가 지나가고 일상은 다시 시작된다.

'뱃사람'에서는 코너 맥퍼슨의 대개 작품이 그렇듯 특별히 사건다운 사건은 없다. 그가 사람과 일상에 대해 섬세한 듯하면서도 무심하게 그려내는 터치는 그것이 특별히 굵거나 선명 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자연스런 일상에 더욱 근접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남자들은(악마로 설정된 록하르트를 제외하고) 지극하게 평범해서 관객 누구라도 쉽게 자신을 대입시킬 수 있다. 그들도 평범하고 그들의 일상 또한 지극히 평범하다.

죽을 만큼 커다란 죄를 지은 사람도 없고, 열에 들뜬 욕망에 사로잡힌 권력가도 없다. 샤키의 평범하다 못해 어리숙해 보이는 모습은 누구에게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샤키에게(또한 우리에게) 밑도 끝도 없이 게임 한판으로 죽음을 결정해야 한다면, 과연 이 게임같은 인생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혹시 지금도 우리는 어디에선가 속고 속이는 게임에 소중한 인생의 주사위를 던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코너 맥퍼슨이 던지는 ‘구원’이라는 명제는 결코 누군가가 내려주는 금동아줄을 말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길만이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혹시 그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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