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대학로… ‘어떻게’ 볼 것인가를 고민할 것

입력 : 2009.11.02 13:14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연희단거리패의 '원전유서'
연희단거리패의 '원전유서'

올해 서울국제공연예술제를 일감하면, 예상보다 적은 수의 작품이 출품된 것으로 여겨진다. 아마도 이것은 주변 환경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서울국제공연예술제가 가진 근본적인 한계 때문은 아닌지도 꼼꼼하게 따져 볼 필요가 있겠다.

그 동안 서울국제공연예술제는 확고하고 일관된 콘셉트를 보여준 적이 없었다. 공연 전체의 콘셉트는 개별 공연을 묶어주고 그 의의를 부여하는 힘이어야 한다. 거꾸로 말하면 전체 공연을 관통하는 콘셉트가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을 때에만, 개별적인 공연의 의의와 가치가 확대되고 심화될 수 있다. 만일 콘셉트가 견실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기획 단계의 주먹구구식 진행을 의미할 것이다. 어떤 작품을 초청하고 어떤 작품을 전시할 것인가에 대해 사전에 합의된 목표가 있었는지 늘 의문스럽다. 단순히 올해의 주요 공연을 모으고, 해외에서 초청 가능한 작품을 모아 두는 형태의 공연예술제라면, 이번 공연예술제를 통해 재고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올해 목표로 내건 ‘Analog & Digilog’를 살펴보아도 이러한 의혹은 가라앉지 않는다. ‘digilog’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합성어로, 유민영이 만들고 이어령이 보급시킨 신조어이다. 아날로그적인 삶과 디지털적인 삶이 맞부딪치는 현실에서 중도 지향적인 삶의 속성을 가리키는 말인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이 공연예술의 콘셉트로 사용될 때는 추상적인 의미 이상을 지녀야 한다.

가령 모든 공연은 아날로그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디지털 시대에도 그 명맥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점에서 ‘디지로그’라는 제목이 필요하다는 식의 설명은,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공연예술제의 목표를 대변할 수 없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러한 추상적인 명명법이나 막연한 설명이 아니라, 과연 이 시점의 공연예술에서 디지털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날로그적인 방식을 고수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또한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과 이에 대한 고민 섞인 대답이다.

여러 작품을 단순하게 모아두는 것만으로 이러한 성과를 거둘 수 없을 것이다. 하나하나의 작품이 어떤 질문과 어떤 대답의 기능을 할 수 있을지 세심하게 따지지 않는 기획이었다면, 공연예술제가 끝난 이후 우리는 상투적인 명명법 하나만을 얻어 들었다는 기억을 지우기 힘들 것이다.

국내외 문화선두주자 집합

공연 기획과 콘셉트에 대한 불만은 적지 않지만, 개별 공연 작품에 대해서는 상당한 기대를 걸게 된다. 특히 한국 참가작과 일본 참가작 가운데 몇 작품이 눈길을 끈다. 가장 주목되는 작품은 아무래도 연희단거리패의 '원전유서'다. 장장 4시간이 넘은 작품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은 상당하다 할 것이다. 왜냐하면 2008년 한국 연극계의 신선한 충격이자 가열 찬 가능성이 과연 초연의 흥분을 딛고, 미래의 한국 연극을 향해 여전히 유효한 자문과 대답을 들려줄 수 있을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평소 연출가 이윤택의 성향으로 보건대, 아무래도 이 작품은 상당 부분 변화되어 재공연 될 것이다. 공연 성패의 관건은,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연극 고유의 모습, 즉 유장한 시간과 함께 사색의 공간을 제공했던 이 작품의 기능이 여전히 살아 있을 것인가에 달려 있다. 2008년 한국 연극계가 놀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작품의 완성도와 의외성도 놀라웠지만, 사실은 그 동안 한국 연극이 새로운 매체(디지털 매체도 포함)에 눌려 상실하고 있었던 연극 고유의 기능을 상기시켜주었기 때문에, 이 작품이 각별히 소중했다고 해야 한다. 공연예술제는 그 기능이 여전히 유효한지 살피는 계기가 될 것이다.

박근형의 '너무 놀라지 마라'도 기대되는 작품이다. 박근형 특유의 간결함과 페이소스가 묻어나는 작품으로, 어쩌면 그가 지금까지 추구했던 공연 세계를 일단락 짓는 작품이기도 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연극의 새로운 탈바꿈을 세심하게 살피게 될 것이다.

'청춘예찬', '대대손손',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를 잇는 시니컬한 가족 일대기는 우리 사회가 처한 몇 가지 한계에 대한 도전이자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초연 때와 같은 반향이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다른 연극들과의 비교를 통해,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마모된 기억을 딛고 다시 한 번 그 가치를 입증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이 밖에 기대되는 몇 작품은 셰익스피어와 관련이 있다. 극단 여행자의 '햄릿'이나 국립창극단이 선보이는 '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고 극단 미추의 '철종 13년의 셰익스피어'가 그것이다(이번 예술제에는 이탈리아에서 출품한 '햄릿―육신의 고요'도 포함되어 있다). 중요 행사나 국제공연예술제에서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고 출품되어 왔다. 따라서 셰익스피어 그 자체만으로는 흥미로울 것도 새로울 것도 없다.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셰익스피어 자체가 아니라, 이 시대에 어떠한 노력이 그 동안 면면히 이어졌던 그토록 많았던 시도들과 오늘날의 연극을 차별화할 수 있을 것인가이다.

해외 작품 중에서는 스즈키 타다시와 히라타 오리자의 작품이 특히 주목된다. 스즈키는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유명한 동시대의 연극인이다. 그의 연극은 이제 일본을 넘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사실 그의 연극을 보고 있으면 이러한 명망에 의문을 던지고 싶은 생각도 간혹 들기도 하는데 이런 점을 차치한다면, 그는 연기 메소드와 극단 운영과 공연 연출로 한국 연극의 중요한 참조사항이 되고 있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의 연극을 본다는 것은 또 하나의 일본을 보는 것이며, 일본 연극의 새로운 한 걸음을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이번 출품작이 서양 원작을 바탕으로 했다는 점에서 그의 새로운 한 걸음이 어떤 서양과 어떤 일본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인지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히라타 오리자는 차세대 일본 연극을 짊어질 연출가이다. 그의 연극 세계 역시 한국 연극계에 익숙하게 알려진 터이지만, 달라진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무대는 주목된다. 한 편 우리 연극계의 세대교체 주자인 박근형이나 양정웅의 연극과도 비교해볼만 하며, 이미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는 이윤택의 연극과도 견주어볼만 하다. 특히 이 공연예술제의 콘셉트대로 한다면, 아날로그 연극이 어떻게 디지털의 매체를 수용, 접목, 확대, 변화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들어보는 시간이 될 듯하다.

이 밖에도 많은 공연이 기다리고 있다. 일일이 소개하고 그 특장점을 열거하지는 못했지만, 고유한 개성과 의의를 지닌 것을 인정한다. 다만 공연예술제가 이러한 개성과 의의를 융합하여 하나의 확대된 공연 형태로서의 ‘거대 축제, 거대 사유’를 완비하지 못한 점은 아쉽다고 해야 한다. 아마도 이러한 거대 사유를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디지털적 사유를 반영해야 했을 지도 모른다.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