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압도적 무대 연출에 압도당한 연기

입력 : 2009.10.29 05:24

연극 '도살장의 시간'

극단 물리의 신작 《도살장의 시간》(연출 한태숙)은 무대와 객석 사이에 놓인 추락방지용 난간을 제거하며 시작된다. 가장 중요한 공간인 도살장은 1.8m 지하에 있다. 굵직한 사건들은 다 여기서 펼쳐지고, 관객은 종종 허리와 목을 쭉 펴고 내려다봐야 했다.

"부식되는 모든 것은 냄새를 풍긴다. …마침내 부패의 냄새마저 사라져버린다면 연극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하겠는가?"

《도살장의 시간》은 이런 선언에 이어 물방울 소리를 들려준다. 주인공 천편(박지일)과 그의 내면(정영두)은 따로 또 같이 움직이며 긴장과 이완을 만든다. 천편은 한때 배우였지만 지금은 도살꾼이고, 도살장 자리에 들어선 극장에서 연극의 죽음을 이야기한다. 그는 연극사 자료실 여직원(서영화)을 희생양으로 삼아 순결을 되찾으려 한다. 무대는 어둡고 음악은 울음 같다.

《도살장의 시간》의 천편(박지일&#8361오른쪽)과 자료실 사서(서영화)./극단 물리 제공
《도살장의 시간》의 천편(박지일₩오른쪽)과 자료실 사서(서영화)./극단 물리 제공

무대와 배우·관객 사이에는 역학 관계가 있다. 무대가 강력하면 배우의 연기가 그것을 넘어서야 관객을 품을 수 있다. 이 연극은 그것을 견디지 못했다. 관객은 공룡의 멸종 같은 연극의 죽음을 슬퍼하는 연극을 보며 압도당하고 싶었는데 미흡했다. 그래서 더 비감했다. 자연법칙에 저항하며 아래에서 위로 에너지를 올려 보내는 것은 역시 어려운 일이었다.

"연극이 바스러진다"는 말을 들은 천편은 "시간이 모든 흔적을 지우진 못하죠. 강렬한 것들은 시간에 저항하죠"라고 반박한다. 연극은 숙명적으로 시간 예술이지만, 시간을 초월할 수 있다는 이 수사학은 모든 연극인의 낭만이다. 일종의 자해(自害)를 통해 소중한 것을 부각시키려 한 《도살장의 시간》은 그러나 밀도와 힘이 달렸다. 천편이 얼마나 연극을 사랑했는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이 연극 속 인물들은 문학적이거나 비현실적이고 그래서 추상적이다. 피 묻은 칼을 갈고, 얼굴에 술을 끼얹고, 사서를 작업대에 묶고 망치로 내리치는 등 거친 에너지를 보여주기는 했다. 그러나 난해함과 즉물성은 좀처럼 어울리지 않았다. 무대를 지하부터 천장까지 활용한 점, 조악한 악단의 연주를 경건한 제사 음악으로 쓰며 꿈과 현실의 틈을 키운 점 등은 인상적이었다.

▶11월 8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02)3673-25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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