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울산을 걷다] '처용(處容)의 고장'에서 '처용'을 찾아 헤매다

입력 : 2009.10.22 03:20

"세계무형유산 등재된 처용무 되살리는 작업해야"
처용암 길 안내도 없고…
8월부터야 처용무 교육… 처용기념관도 건립해야

지난달 말 낭보(朗報)가 전해졌다. '처용무(處容舞)'가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Intangible Cultural Heritage of Humanity)에 등재된다는 소식이었다. 처용무의 주인공은 '처용(處容)'이다. 그의 이야기인 처용설화는 울산의 처용암에서 비롯됐고, 처용의 용서와 화해 정신은 지금의 울산을 상징하는 한 축이다. 전국 팔도에서 모인 110만 울산 시민의 대표축제에 '처용문화제'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그래서다. 그런 '처용의 춤'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된다니 가슴 벅차다. 1200여년 전 처용의 발자취와 옛이야기가 그리워 길을 나섰다.

울산 남구 삼산동 울산시외버스터미널 '울산관광안내소'에서 '처용암' 가는 길을 물었다. 그곳은 처용설화의 출발지다. 하지만 누구에게서도 제대로 된 길안내를 들을 수가 없었다. 안내원이 무심하게 건네준 울산관광안내도를 한참 뜯어봤지만, 처용암 가는 길은 쉽사리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울산사람'인 내게도 이만큼 어려우니….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에 등재될 예정인 처용무(사진 위)와 처용설화가 전해져오는
처용암(사진 아래). 그러나 정작 처용무의 명맥이 거의 끊어져 있어 울산에서‘처용
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은 실정이다.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에 등재될 예정인 처용무(사진 위)와 처용설화가 전해져오는 처용암(사진 아래). 그러나 정작 처용무의 명맥이 거의 끊어져 있어 울산에서‘처용 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은 실정이다.
결국 '내비게이션'에게 길을 물었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황성동 처용암까지 8.4㎞. 차로 18분 걸렸다. 하지만 울산석유화학공단 사이로 난 길은 공포스러웠다. 질주하는 화물차량들은 거칠고 요란한 소음으로 위협하듯 윽박질러댔다. 도로변 대형 공장시설들의 위압적인 모습에도 기가 질렸다. '처용로'라는 길안내판은 뿌옇게 매연을 덮어쓴 채 초라하게 서있었다. 처용을 만나러 가는 길에서 처용을 잊고 말았다.

외항강 하구에서 물 가운데 떠있는 작은 섬을 바라보았다. '처용암'이다. 일연(一然)이 쓴 〈삼국유사〉 '처용랑망해사'조에 이 바위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동해의 용은 기뻐하며 곧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왕(신라 49대 헌강왕)의 수레 앞에 나타나 덕을 찬양하며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하였다'는 구절이다. 처용의 첫 등장이며, 처용설화와 처용무의 시작이다. 그러나 바위 섬 뒤로 펼쳐진 광경은 나를 압도하며 짓눌렀다. 치솟은 철탑과 거대한 정유탱크, 쉼없이 뿜어대는 굴뚝의 매캐한 연기…. 눈이 따갑고 머리가 지끈거려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1990년대 초반무렵, 울산시가 처용암이 빤히 보이는 해안에 작은 공원을 만들어놓았다. 처용암을 찾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온갖 쓰레기로 가득찬 폐허에 가까웠다. 공단 화물차량 10여대가 아무렇게나 불법주차하고 있었고, 쓰레기더미 옆 곳곳에 모닥불을 피운 흔적들이 흉터처럼 남아있었다. 화장실에선 지독한 악취가 새어나와 공원 일대를 뒤덮었다. '아….' 간신히 초라하게 서 있는 안내판에서 '울산시 지정기념물 제4호'라는 글귀를 읽었다. '폐허만 남았을 뿐인데….'

발길을 돌려 울주군 청량면 율리 영축산(해발 353m)의 망해사터를 찾았다. 삼국유사에 '왕은 돌아오자 영축산 동쪽 기슭의 좋은 땅을 기려 절을 짓고 망해사(望海寺)라 하였다.(중략) 이는 처용을 위해 지은 절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오랜 세월에 절을 잃어버리고, 절터도 불분명하다. 그나마 망해사터 석조부도(보물 제173호)만 남아 절터를 짐작할 뿐이다. 오래전 망해사에서 내려다보였다는 '처용의 바다' 역시 볼 수 없었다. '이곳이 과연 '처용의 고장'이긴 한 것인가….'

울산시 중구 우정동에서 19년째 처용탈을 만들고 있는 김현우(55)씨가 있다. 그는 처용무가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됐다는 소식에 "처용탈이 있기 때문에 처용무가 있다. 그래서 감회가 새롭다"고 했다. 그는 조선 성종 때 만들어진 악전(樂典)인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전하는 처용의 얼굴을 복원하는 데 청춘을 바쳤다.

단풍나무를 이용해 만드는 그의 처용탈은 눈이 깊고 그윽하다. 또 코가 크고 턱이 툭 튀어나왔다. 사모에 복숭아 7개가 달렸고 귀에는 모란꽃도 활짝 피었다. 요사스러운 귀신을 물리치는 벽사(�J邪)의 무서운 표정이 아니라 길을 가다 쉽게 마주칠 수 있는 '울산의 얼굴'이다. 안타까운 것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처용탈을 만드는 그는 8년 전부터 울산시 무형문화재 지정을 신청하고 있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고증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라고 한다.

울산에서 처용무는 구경조차 어려운 춤이었다. 한때 처용무 열기가 불었지만 명맥이 끊어져버렸다. 뒤늦게 울산시문화원연합회(회장 이병우)가 지난 8월부터 31명의 지원자를 받아 처용무 교육에 나섰다. 중요무형문화재 39호 처용무 기능보유자인 김중섭(처용무보존회 회장)씨와 김용씨, 전수 조교 이진호씨 등 국내 처용무 고수들이 강사로 참여하고 있다. 2억원의 예산도 확보했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이다.

처용을 찾아다니는 동안 처용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처용기념관'을 건립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울산에 처용기념관이 들어서야 처용이 살고 처용무가 산다"는 주장이다. 처용무가 세계인의 주목을 받을 동안 처용의 본향에선 처용기념관조차 갖고 있질 못했다니 참으로 부끄럽고 답답한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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