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와 함께 가둬 연습시킨 스승 덕분"

입력 : 2009.10.22 03:12

세계무대 데뷔 20년 맞은 피아니스트 백혜선
"그땐 원망… 이젠 깊은 뜻 깨달아"
사연 담긴 곡 모아 내달 리사이틀

피아니스트 백혜선씨는 1983년 미국 보스턴의 명문인 뉴잉글랜드 음악학교에 입학한 뒤 해방감을 만끽했다. 2주 뒤에 레슨이 잡혀도 친구들과 수다를 떨다가, 사나흘 전 부랴부랴 연습해서 피아노 앞에 앉기 일쑤였다. '건반 위의 철학자'로 불리는 스승 러셀 셔먼(Sherman)이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어느 날 백혜선은 스승에게 호된 꾸지람을 듣고 당장 리사이틀을 준비하라는 엄명을 받았다.

스승은 슈만의 환상곡,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1번, 리스트의 소나타 B단조로 프로그램까지 짜준 뒤 "불시에 검사할 테니 전화를 못 받으면 학교 그만둘 각오를 하라"는 불호령을 내렸다. 휴대전화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세계 데뷔 20년 기념 전국 순회 리사이틀을 갖는 피아니스트 백혜선은“피겨 스케이팅에서 세계 선수권 대회는 모
든 노력의 종착점이지만, 음악에서 콩쿠르는 끝이 아니라 단지 시작일 뿐”이라고 말했다./CMI 제공
세계 데뷔 20년 기념 전국 순회 리사이틀을 갖는 피아니스트 백혜선은“피겨 스케이팅에서 세계 선수권 대회는 모 든 노력의 종착점이지만, 음악에서 콩쿠르는 끝이 아니라 단지 시작일 뿐”이라고 말했다./CMI 제공
피아노와 함께 '감금'에 들어간 백혜선은 두세 달을 온통 리사이틀 준비로 보냈다. 그러나 이 경험은 1989년 윌리엄 카펠 국제 콩쿠르 1위에 입상한 동력이 됐다. "스승이 전화를 걸어서 '악보 몇 페이지를 연습 중이냐'고 물으시면 당장 대답해야 했어요. 그때는 원망스러웠지만 나중에야 깊은 속뜻을 깨달았죠."

올해로 세계 데뷔 20년을 맞은 백혜선이 자신의 삶 한 페이지에 꽂아두었던 음악들을 가지런히 무대에 펼쳐보인다. 다음 달 15일 서울 예술의전당 등 전국 4개 도시에서 열리는 피아노 독주회다. 스승의 꾸지람 때문에 맹렬하게 연습했던 리스트의 소나타 B단조부터 1991년 벨기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입상 당시 결선에서 연주했던 모차르트의 소나타 F장조까지 사연이 깃든 곡들을 정성껏 골랐다.

그는 "당시 콩쿠르 3차에선 24시간 전에 연주곡목을 발표했는데, 미리 연습해간 곡들과 너무 달라서 2시간 잠잔 뒤에 22시간을 꼬박 연습해야 했다. 무대에서 연주한 직후 쓰러지다시피 했다"며 웃었다. 하지만 이 대회에서 백혜선은 4위 입상과 모차르트 특별상을 받았다. 버르토크의 피아노 소나타는 1989년 윌리엄 카펠 콩쿠르 입상 직후에 뉴욕에서 열렸던 리사이틀에서 첫선을 보였던 곡이다.

리즈와 퀸 엘리자베스, 러시아 차이콥스키 콩쿠르 등에 두루 이름을 올렸던 백혜선은 손열음·김선욱 등 젊은 후배 연주자들이 세계 유수의 대회에서 거침없이 입상할 때마다 놀라고 또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했다. 백혜선은 "후배들이 당장 지금이 아니라, 20년 뒤의 음악과 삶에 눈을 두었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백혜선 피아노 리사이틀, 11월 8일 부산문화회관, 13일 대구 천마아트센터, 15일 서울 예술의전당, 17일 울산 현대예술관, (02)518-7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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