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예술의전당 서울시향 연주회

입력 : 2009.10.05 03:46

대타 지휘자… 그러나 쾌적한 순항

격렬한 충돌이나 부상 위험은 없다고 해도, 언제나 대타(代打) 작전을 써야 할 상황이 발생하는 곳이 음악계다. 레너드 번스타인(지휘), 루치아노 파바로티(테너), 랑랑(피아노)까지 수많은 거장과 스타들도 출발은 대타였다. 현재 유럽 무대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핀란드 출신 지휘자 미코 프랑크(Franck)가 건강상 이유로 예정했던 2차례 콘서트 지휘를 취소하자, 서울시향도 대타 급구에 나섰다. 프랑스 출신의 지휘자 파스칼 로페가 지난 1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서울시향 연주회에 긴급 투입됐다.

이날 전반부는 라흐마니노프와 시벨리우스 등 온통 낭만주의 곡으로 채워져 있었다. 현대음악 전문인 지휘자와는 자칫 기름과 물처럼 서로 섞이지 않을 우려가 컸다. 하지만 음산한 바다 위에 외로이 떠 있는 바위섬을 그린 회화에서 착상을 얻은 라흐마니노프의 교향시 《죽음의 섬》부터 로페는 잔물결 하나하나에 휩쓸리지 않고, 짙고 무겁게 거대한 파도를 그려나갔다.

1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연주회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세르게이 하차트리얀
(앞줄 오른쪽)이 서울시향(지휘 파스칼 로페)과 협연한 뒤 인사하고 있다./서울시향 제공
1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연주회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세르게이 하차트리얀 (앞줄 오른쪽)이 서울시향(지휘 파스칼 로페)과 협연한 뒤 인사하고 있다./서울시향 제공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1악장은 지나친 감상에 탐닉할 경우 감상주의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아르메니아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세르게이 하차트리얀의 섬세하면서도 정교한 활은 마치 서슬 퍼런 칼날에 벤 것처럼 시렸다. 하차트리얀은 은은하고 낭만적인 2악장의 선율로 그 상처를 보듬더니, 3악장에서 춤곡의 흥까지 그대로 살렸다.

2부에서 들려준 베토벤 교향곡 5번은 서울시향이 정명훈 예술감독과 수없이 호흡을 맞췄기에 단원에게나, 관객에게나 너무나 친숙하다. 든든한 뒷심이 될 수도 있지만 상투적 해석의 함정에 빠질 위험도 그만큼 컸다. 하지만 로페는 청중의 박수가 채 끊기기도 전에 1악장 '운명의 테마'를 시작한 뒤, 한껏 가속 페달을 밟으며 호쾌하게 질주했다. "마치 '영웅'(베토벤 교향곡 3번) 같은 '운명'(베토벤 교향곡 5번)"이라는 음악칼럼니스트 최은규씨의 말 그대로였다.

호른은 발을 헛디디기 쉬운 1악장에서도 안정감 있게 버텨냈고, 오보에는 짧고도 매력적인 독주(獨奏)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았다. 고뇌할 때조차 따스하고 인간적인 정명훈의 지휘와는 정반대에 가까웠지만, 그동안의 연주가 탄탄한 밑거름이 된 것만은 분명했다. 국내 악단의 '승차감'도 외국 명품 못지않게 쾌적할 수 있다는 걸 이날의 명쾌한 호연(好演)이 입증했다.

서울시향의 10일 예술의전당 연주회에서는 디에고 마테우스가 지휘봉을 잡아 베토벤 교향곡 7번 등을 연주한다. (02)3700-6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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