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승우! 많이 맞았지. 왜소하지만 내공 있는 학생이었어…”

입력 : 2009.03.13 09:52

한국 뮤지컬계의 대부 남경읍 인터뷰

뮤지컬 슈퍼스타 남경읍(왼쪽)과 남경주 형제
‘31년 배우생활, 26년 교육자 생활.’ 한 줄 프로필만으로도 관록이 느껴지는 한국 뮤지컬계의 대부 남경읍(51)을 만났다. 3월 9일 오후 5시. 그가 운영하는 서울 사당동 예장연극영화학원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시작했다. 진한 자주색 후드 티에 국방무늬 후드 점퍼를 입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쉰한 살의 나이는 느낄 수 없었다. 그저 강렬한 눈빛과 부드러운 미소에서 베테랑 ‘배우’의 카리스마와 오랜 세월 ‘선생님’으로 지낸 연륜이 느껴졌다.

◆ 제자 조승우. “고교 3년 간 담임 맡아…”

조승우가 존경한다는 스승 남경읍과 만났는데 그의 이야기를 빼먹을 순 없었다. 남경읍에게 계원예고 당시 조승우에게서 특별함을 느꼈었냐고 물었다.

“나한테 많이 맞았지 뭐… 하하하. 승우는 계원예고 때 우연찮게 3년 내내 담임을 맡았었는데 1학년 땐 그저 체구가 왜소한 학생이었어요. 그런데 아주 고집이 강한 녀석이었죠. 고2 2학기 작품에 내가 좀 촐싹대는 역할을 줬더니 다른 역할을 달라고 한 달을 조르더라고요. 내가 질려서 한번 노래를 불러보라고 했습니다. 그 땐 쓸데없는 고집을 부린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진짜 잘 부르는 겁니다. 엄청난 노력이 보였어요. 바로 그 역할을 맡겼죠. 그 때 내공이 강한 녀석이라고 느꼈습니다.”
조승우가 제 2회 뮤지컬 어워즈에서 남우주연상을 받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남경읍 선생님께 이 상을 바친다”고 수상소감을 밝혔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물었다.

“승우가 그런 말을 해서 처음엔 깜짝 놀랐죠. 생각해 보면… 녀석이 연습 때 준비물을 놓고 와서 매를 든 적이 있어요. 당시 승우가 정신이 헤이해 진 것 같아서 따끔하게 혼냈죠. 그리고 감정이입을 못하기에 제가 뺨을 때리고 욕을 시킨 적도 있습니다. 처음엔 주저하더니 곧 잘하더군요. 그래서 '남경읍 XXX'라고도 하라고 했어요. 그런데 눈물을 흘리며 그건 도저히 못하겠다고 하더군요. 아마 그 때 좀 강하게 인상이 남았던 것 같아요.”

◆ 쉼 없는 배우 남경읍. “좋은 작품 놓치기 싫어…”

남경읍은 다음 작품을 찾아보는 중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미 선택했다”며 새로 시작할 작품이야기를 쏟아냈다.

“‘두 번째 태양’이라는 작품인데 창작뮤지컬이에요. ‘부루’와 ‘가온’이라는 두 나라가 나와요. ‘가온’을 지켜준다고 여기는 한 작은 섬을 ‘부루’가 빼앗으려고 하면서 시작되는 갈등으로 비극적 결말을 맞죠. 결국 ‘욕망에서 벗어나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자’는 메시지를 담은 뮤지컬이에요. 거기서 ‘가온’의 왕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제 곧 연습에 들어가고 5월 20일에 지방공연부터 돌 계획이에요.”

남경읍은 지난 해 6월에 그의 뮤지컬 인생 30주년 기념 공연 ‘I am 남 Sam'을 마치고 이어서 8월부터 시작한 ’월드버전 햄릿‘을 불과 3주 전에 끝마쳤다. 그리고 송원대학에선 교수로, 예장연극영화학원과 남뮤지컬아카데미에서는 원장으로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 쉬는 시간도 없이 바로 다음 작품에 들어가는 이유가 궁금했다.

“좋은 작품이 눈앞에 있는데 어떻게 해. 하하하… 사실 원래 1년에 한 작품씩 했었는데 올 해부터는 기회가 되는 데로 하려고 해요. 데뷔 30주 년인 작년을 기점으로 무대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죠. 후학 양성에도 여전히 힘쓰겠지만 열정적으로 배우활동을 펼칠 생각입니다.”

◆ 호랑이 선생님 남경읍. “예술에는 ‘예도’가 있다.”

남경읍의 제자 2000여명이 현재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거기에는 조승우 외에도 황정민, 오만석, 박건형, 소유진 같은 걸출한 스타들이 많다. 그리고 그 제자들은 선생님을 위해 30주년 기념 공연을 만들 정도로 그를 존경한다. 그에게 수많은 제자에게 존경을 받는 비결을 물었다.

“비결은 모르지만 전 엄하게 가르칩니다. 예술을 하려면 먼저 기술이 필요하죠. 기술은 반복적인 연습으로 숙달할 수 있어요. 그 때 초심을 잃고 게으름을 피우면 호되게 혼냅니다. 그리고 무술에 ‘무도’가 있듯이 예술에도 ‘예도’가 있어요. 예의가 없는 학생은 용납하지 않죠. 이런 기본기들을 갖췄을 때 예술가로서 예술을 표현할 수 있다고 가르쳐요. 그리고 저 자신도 발전을 위해 항상 노력합니다.”

자신이 이론적으로 부족하다는 생각을 계속해온 그는 2000년에 단국대 연극영화과 3학년으로 편입을 했다. 당시 98학번이 3학년이었는데 조승우를 비롯한 그의 제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교수도 두 분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색하게 시작한 늦깎이 공부는 이어 2002년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진학까지 이어졌다.

“처음 제가 편입했을 때 학생들이 회의를 했다고 합니다. 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난감했던 거죠. 그래도 금방 친해져서 날 형이라고 불렀던 친구도 있었습니다. 결국 동기들의 ‘감히 어디서…’란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다시 그렇겐 안 불렀지만요. 하하하…”

◆ ‘연습벌레’ 남경읍. “평생 실력이 늘어가는 배우…”

남경읍은 연습벌레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모든 것을 끊임없이 반복 숙달한다. 그는 'I am 남 Sam' 공연을 위해 클래식 피아노곡 2곡을 9000번 넘게 연습하기도 했다. 50을 넘긴 나이에 그런 에너지가 어디서 나오는 지 물어봤다.

그러자 그는 뜬금없이 “난 신문을 하루에 3시 간씩 꼭 챙겨 본다”며 대답했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신문을 보는데 ‘80세 할아버지 피아니스트’에 관한 기사가 있었어요. 외국의 한 80세 노인 피아니스트가 연주회를 했답니다. 그런데 공연 쉬는 시간에도 한 쪽에서 곡 연습을 하고 있는 노인을 보고는 어떤 기자가 좀 쉬시라고 했대요. 그랬더니 대뜸 노인이 웃으면서 하는 말이 ‘요즘도 실력이 조금씩 느는 걸 어떻게 쉬어~’였답니다.”

그 때는 마침 그가 뮤지컬 배우로 자신감에 충만해 있을 때였다. 그는 그 순간 망치로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이후부터 그는 결코 안주하지 않았다. 그 노인처럼 몇 살이 되도 실력이 늘어가는 배우가 되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들도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고 같은 생각을 가지게 될 거라고 믿었다.

◆ 아버지 남경읍. “늘 자상한 아빠.”

최근 그에겐 축하할 일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올 2월에 그가 동국대 연극영화과 석사과정을 수료한 것. 두 번째는 그의 하나뿐인 딸 남유라(20)씨가 이번에 단국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입학한 것이다. 그녀는 계원예고를 졸업했다. 아버지의 길을 그대로 밟고 있는 것이다.

유라씨는 남경읍을 “바쁘지만 늘 자상한 아빠”라고 표현했다. 이어서 그녀는 “얼마 전엔 내가 대학 가는데 자신이 해주신 게 없다며 공연중인데도 2박 3일 동안 아빠 고향을 함께 여행했다”면서 “아무리 바빠도 매일 몇 분이상은 꼭 그날 있었던 일을 대화로 나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아빠와 삼촌(뮤지컬 배우 남경주)과 함께 ‘사랑은 비를 타고’를 공연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예장연극영화학원 지하 연습실에는 남경읍의 제자인 송원대학 엔터테인먼트과 학생들이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배우, 스텝 구분 없이 작품회의에 다같이 참여하고 있었다. 공연의 모든 부분을 알아야 나중에 스텝을 이해할 수 있다는 남선생님의 교육방침이라고 했다.

안무조교를 맡고 있는 염경민(남·25)씨는 “고3때 선생님을 만났고 나에겐 아버지 같은 분”이라며 “수업엔 정말 엄격하시지만 학생 한 명, 한 명에 대해 세세히 신경 쓰신다”고 말했다. 2학년 김유리(여·21)씨는 “처음엔 무섭지만 알면 알수록 아빠처럼 자상하시다”며 “항상 우리 옆에 묵묵히 서 있는 오래되고 큰 나무”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남경읍에게 마지막으로 배우와 교육자로서 어디까지 욕심을 내고 있냐고 물어봤다.

“욕심은 버렸어요. 대한민국과 세계 최고가 되겠다는 욕심으로 너무 긴장했던 시절이 있었죠. 이제 ‘놀아보자’는 생각입니다. 무대에서, 강단에서 놀려면 그만큼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겠죠. 전 죽을 때까지 연습벌레일겁니다.”


※ 남경읍은…

1958년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났다. 1978년 서울시립가무단에 들어갔고 1983년부터 계원예고에서 뮤지컬 실기지도를 시작했다. 그의 출연 작품은 환타스틱스, 웨스트사이드스토리, 돈키호테, 레미제라블, 번데기, 사랑은 비를 타고 등 80여 편이 넘는다. 1991년 연극영화의 해 최우수 남우조연상(웨스트사이드스토리), 1994년 제 18회 대한민국연극제 남우주연상(번데기), 1996년 제 2회 한국뮤지컬대상 남우주연상(사랑은 비를 타고)을 수상했다. 현재 송원대학 엔터테인먼트과 전임교수, 남뮤지컬아카데미원장, 예장연극영화학원원장을 맡고 있고 배우로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한국 뮤지컬의 역사를 함께한 그는 ‘조승우의 스승’, ‘남경주의 형’으로 많이 알려져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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