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고 들어보세요, 보이나요?

입력 : 2009.02.17 16:53

'돈 주앙'의 세 주역 이지숙, 서혜리, 강태을

이사벨역의 이지숙/사진=성남문화재단

최선의 노력으로 최고의 추억을 위해

돈 주앙의 절친한 친구로 등장하는 이사벨은 사실상 어느 역할보다도 캐스팅이 가장 까다롭다. 인물의 심리도 복잡할 뿐 아니라 음역 자체가 고난도이기 때문이다. 이사벨은 돈 주앙을 등 뒤에서 말없이 지켜보며 때로는 따끔한 충고를 하고, 때로는 누나처럼 한없이 사랑을 주는 인물인지라 캐릭터 자체가 꽤 복잡하다. 게다가 뮤지컬 넘버로서는 드문 도 샵의 음역까지 소화해야 하는 탓에 원작에서는 실제 성악가가 이 역할을 맡기도 했다.

이지숙은 대학 졸업 후 기성 무대에서 3년 정도 연기한 경험이 있지만, 본격적인 대극장 뮤지컬은 이번이 처음이다. 어릴 때부터 유독 노래를 좋아했던 이지숙은 고등학생 때 모 엔터테인먼트사의 오디션을 보기도 했고, 당시 우연히 그를 발견한 기획사를 통해 이미 어린 나이부터 보이스 트레이닝을 시작했던 남다른 경력이 있다.

가수와 연기자의 갈림길에서 스무 살의 이지숙은 결국 연기자를 선택했고 대학도 연극영화과를 진학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연기의 한계에 부딪힌 그는 급기야 휴학을 하고 방황을 했다. 우연히 후배들이 만든 뮤지컬 '판타스틱스'의 연습을 보던 날, 이지숙은 식어버린 줄만 알았던 가슴 속의 불덩이가 파닥거리며 타오르는 걸 느꼈다.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었다.

“연기는 제 인생에 처음으로 맞은 시련이었고, 아마도 끝까지 갈 시련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지숙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절망적인 순간에 결국 제 자리를 찾아낸 셈이다.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외모를 가진 이지숙은 뜻밖에도 조숙한 목소리를 가졌다. 그는 이번 무대에서 이사벨의 순수한 영혼을 분명히 멋지게 소화해낼 것이다.

마리아 역의 서혜리/사진=성남문화재단
한편, 돈 주앙의 사랑하는 연인 마리아 역으로 발탁된 서혜리는 선발 과정 자체부터 화제였다. '돈 주앙'의 UCC 오디션 심사에는 자그마치 1천 여 명이 넘는 후보자들이 등록했다. 실용음악과 4학년에 재학 중인 서혜리는 여기에서 105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신예다.

그런데 더 기막힌 사실은 예선 통과 사실을 통고받던 날, 서혜리는 목 상태가 썩 좋지 않아서 ‘준비가 부족’하다며 거절을 했단다. 최종 심의가 있기 전 '돈 주앙' 측에서는 서혜리에게 재차 예선 등록 제의를 했다. 그때야 비로소 서혜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혹시 이것이 인연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거죠. 부족하더라도 용기를 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었어요.” 결국 서혜리는 당당하게 마리아로 합격했다.

조각가로 설정되어 있는 극중 마리아는 의외로 차분하고 중성적인 매력이 큰 여자다. 하늘거리는 여성스러움이나 강렬한 성적 매력보다는 진실하고 투명한 아름다움이 훨씬 크다. 돈 주앙이 마리아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이유도 이런 측면이 이전의 여자들과는 변별되는 지점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리아의 노래는 대부분 자기 고백 식이에요. 그녀는 건강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가만히 노래를 부르다보면 밝고 따뜻한 에너지를 느낄 수 있어요. 제가 그녀와 닮은 면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자신의 가치를 미처 잘 깨닫지 못한 배우를 만날 때가 있다. 때로는 겸손해서이기도 하고 때로는 어린아이처럼 아직 때 묻지 않은 맑은 영혼인 탓도 있다. 서혜리는 후자다. 어린 나이에 비해 성숙하고 지적인 외모를 가진 서혜리는 실제로도 로맨틱 영화보다는 반전영화를 좋아하고 의외로 성격도 털털하다. 그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보다도 꾸밈없는 진솔함과 성실함이다.

연습 상황을 MP3에 그대로 녹음해놓았다가 집을 오가는 길에 반복해서 듣는데, 이는 오래 전부터 레슨을 받으면서 지녔던 버릇 때문이다. 어디에서 어떤 지적을 받았는지를 차분하게 정리해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 지금의 서혜리가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인 셈이다. 이것이 바로 공연 전보다 공연 이후에 더욱 그녀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돈주앙역의 강태을/사진=성남문화재단

한국 최고의 옴므파탈은 강태을이다

이번 작품 '돈 주앙'에서 강태을은 단연 돋보이는 배우다. 강태을은 지난 5년간 일본 사계 극단에서의 활동을 끝내고 지난해부터 본격적인 국내 활동을 시작하면서 매번 이목을 끌었다. 김다현과 주지훈의 트리플 캐스팅에서도 강태을은 가장 먼저 선점되었던 배우다.

일본 극단 사계의 배우가 된 데에는 김효경 선생의 영향이 컸다. 젊고 유능한 배우들의 한일무역(?)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왔던 김효경은 2004년에 강태을을 포함, 무려 34명이나 되는 배우들을 이끌고 사계 오디션에 참가했다. 그가 한국의 유능한 배우들을 일본 극단으로 유입시키는 데 이토록 적극적이었던 까닭은 무엇보다도 한국 배우들이 좀 더 나은 시스템에서 훈련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일본에서는 확실히 달랐어요. 밥 먹고 자는 시간을 빼면 거의 하루 종일 훈련이거든요. 발레, 재즈댄스 등의 신체 훈련은 기본이고, 노래와 연기도 끊임없이 훈련해요. 한국은 그런 훈련 시스템을 제대로 갖춘 극단을 찾아보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사계 극단은 때마다 세계의 유능하고 젊은 배우들을 수혈 받는 대신 적당한 시스템을 제공하는 셈이다. 월급까지 받아가면서 훈련받는 일을 배우가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사계를 거쳤던 대부분의 한국 배우들은 그 시간을 이 악물고 참아야 했던 시간이라고 회고한다.

“한 명의 개성 있는 배우로서가 아니라 사계라는 커다란 기계의 부속품 같은 느낌을 받게 되니까요. 창의적인 발상보다는 몇 번을 해도 똑같이 정확한 것이 더 중요한 가치죠. 관객들의 뜨겁고 자유로운 열기와 시끄러운 환호, 박수 소리도 한국과 일본은 다릅니다. 일본은 오히려 흥분을 조용히 자제하면서 칭찬하는 식이죠. 반드시 다시 돌아오겠다는 생각이 아니었으면 버티기 어려웠을 겁니다.”

강태을은 승부욕도 강하고, 그만큼 자기 관리와 준비가 철저한 무서운 배우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주춤하지 않고 매섭게 낚아챌 수 있는 것도 그런 성격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강태을은 지난해 '돈 주앙'의 캐스트로 확정되고도 그 사이에 이미 두 작품에나 출연했다. 이지나 연출의 '대장금'과 '록키호러 쇼'에 출연한 것.

“'돈 주앙'에 서기 위한 발판이라고 생각했어요. 자세나 노래법을 많이 연구했던 작품들이었죠. 전 성격상 준비되지 않으면 잘 나서지 못합니다. 그래서 유난히 첫 걸음, 첫 동작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죠.”

학생 시절 농구 선수를 했던 경력 탓에 강태을의 몸은 마른 체형인데도 꽤 다부지다. 그런데 운동 경력은 신체적 건강함보다 정신적 무장에 더 많은 도움을 준 것 같다. ‘두 번 속지 말 것’ ‘속은 것은 반드시 되돌려주기’ ‘때리지 않고 제압하기’ - 그래서 강태을은 한 번의 실패에는 관대해도 결코 두 번의 실패는 용납하지 않는다.

그의 아버지 강만홍은 명상연극가라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부산 출신의 배우 겸 연출가이다. 인도를 오가며 마음 수련을 하고, 미국의 라마마 극단과의 교류를 지속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공연 세계를 구축해온 아버지가 강태을에게는 절대적인 정신적 스승이었다. 아버지의 활동 영역과는 전혀 다른 장르에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고 싶어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언제나 등 뒤에서 든든한 응원군이 되어 주었다. 아들은 은연중에 아버지로부터 배우로서의 자세와 사람과 삶에 대한 철학을 체득해왔다. “자신을 열어야 한다” “하늘을 울리는 배우가 되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씀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야 가슴에 하나씩 들어와 알알이 박히고 있다.

“얼마 전 우연히 '돈 주앙' 공연 DVD를 보다가 생각했어요. 이 공연을 하고나면 진짜 배우가 되어 있겠구나 하는. 아마 스스로 많은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작품이 될 것 같습니다.”   

뮤지컬 '돈주앙'의 세 주역/사진=성남문화재단
뮤지컬 '돈주앙'의 세 주역/사진=성남문화재단
별자리 가운데 특히 쌍둥이자리는 특히 자신이 유리한 고지에 스스로 자리를 잡을 줄 아는 영리한 이들이다. 다시 말해서 찾아 들어온 행운을 쉽게 놓치는 법이 없다는 뜻이다. 우연이겠지만, 아트뷰가 '돈 주앙' 출연진 가운데 특히 주목한 세 배우는 모두 쌍둥이자리의 배우들이었다.

자신의 유리한 고지를 직감할 줄 아는 지혜를 선천적으로 타고난 바탕 위에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느낌의 이지숙과 털털하고 따뜻한 매력을 가진 서혜리는 성격적으로도 수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을만한 자질이 충분한 사람들이다. 어디선가 쌍둥이 별자리의 남자는 ‘언제나 청춘’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별 의심이나 흔들림 없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 묵묵히 걸어가는 성격인지라 제 자리에서 빛이 나는 시간이 유난히 길다는 것. 강태을의 돈 주앙이 유독 빛나는 까닭이 그 때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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