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행운, 리타에게 박수를

입력 : 2009.01.23 12:44

연극 '리타 길들이기' 주연 배우 최화정

데뷔 초창기 연극 배우로 활동하던 최화정

세상을 살다보면 예상치 못했던 수많은 일들을 겪게 된다. 그리고 그중 상당수의 일들은 마치 오래 전부터 정해져 있던 것처럼 운명적으로 다가오곤 한다. 돌아보면 우연한 계기로 방송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도, '리타'라는 배역을 만나게 된 것도 모두 애초에 정해진 필연이 아니었던가 싶다. 연극 '리타 길들이기'의 앙코르 무대 연습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요즘,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이 시간을 선사해준 '리타'라는 필연에 부쩍 고마운 생각이 든다.

학창시절 밝고 명랑한 학생이었던 나는 주어진 일은 확실하게 해내는 '똑순이'로 통했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즐기지는 않았던 탓에 배우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어린시절부터 그림을 그려왔던 나는 미대에 진학할 꿈을 키웠지만 대학 진학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진로에 대한 고민에 빠져있던 무렵, 기회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곳에서 찾아왔다.

당시 우연히 알게 됐던 故 김인경 PD님의 부탁으로 TV드라마에 쓰일 기내멘트를 녹음했던 것이 인연이 되어 단막극에 출연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색다른 경험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출연했던 단막극은 또 다른 방송출연 기회를 만들어 줬고, 어느덧 나는 신인 배우로 세상에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94년 당시 연극 '리타 길들이기' 포스터
최근까지 활발하게 활동중인 라디오 DJ를 시작하게 된 계기도 우연히 찾아왔다. 방송활동을 막 시작했을 무렵 신인들 여러 명을 소개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했는데 방송이 끝난 후 담당 PD가 따로 나를 부르는 것이었다.

무슨 실수를 했나 싶어 긴장했는데 목소리가 명랑하고 독특하다며 라디오 프로그램 내의 작은 코너를 녹음해 보자고 제안하는 것이 아닌가. 데뷔 초반, 방송활동에 열정이 넘쳤던 내가 그런 기회를 마다할리 없었다. 작은 코너 하나를 맡아 시작한 라디오 DJ 활동은 AM에서 FM으로 자리를 옮기고, 프로그램 하나를 진행하게 되고, 정오 12시라는 황금시간대를 책임지게 되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신인배우로 방송활동에 한창이던 1991년, 연극 '리타 길들이기'를 만난 것은 내 인생의 행운이었다. 연극을 해야겠다는 큰 욕심도 계획도 없었던 내게 "연극을 해보자"는 제의가 들어왔고, 재미있는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았던 나는 생기 넘치고 발랄한 리타의 매력에 푹 빠져 도전을 감행했다. TV와 라디오에서만 활동하던 내게 관객의 반응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무대는 신선함 그 자체였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아직 어렸던 그 시절의 나는 대사와 동선을 잘 외우는 것이 연기를 잘 하는 것이라는 철없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때문에 리타의 상대역인 프랭크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지 못했고, 프랭크 역의 윤주상 선생님과 호흡을 맞추며 교감을 나눌 생각은 하지 못한 채 많은 대사를 읊어내기에만 급급했다. 그런 나의 부족함에도 윤주상 선생님과 박계배 연출님을 비롯한 수많은 스태프들의 피와 땀이 어린 노력으로 공연은 전회 전석 매진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큰 사랑을 받았다.

17년만에 다시 연극 '리타 길들이기'로 돌아온 최화정
그 후, 방송활동을 하며 긴 세월을 보내는 동안 '리타 길들이기'를 다시 한 번 해보자는 제안이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나 '리타'라는 배역은 밝고 명랑했던 젊은 시절에 어울리는 역할이라고 생각했고, 사람들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과거의 명성에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아 매번 제안을 거절했었다.

그러던 중, 지난 겨울 '연극열전 2'의 프로그래머인 조재현 씨의 연락을 받았다. 그는 '리타 길들이기'를 다시 한 번 해보자는 제안을 해왔다. 17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리타'를 다시 연기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나는 처음에는 정중히 거절을 했다. 그러나 마음 속 어딘가에서 '리타'를 다시 만나보고 싶다는 열망이 생겨났고, 주위 사람들의 큰 응원에 힘입어 다시 한 번 '리타 길들이기'에 도전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지난 3월, 17년 만에, 우여곡절 끝에 다시 선 무대는 나에게 많은 것을 선물해 주었다. 체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당연한 진리를 새삼 깨닫게 했음은 물론, 17년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사람'과 '관계'에 대한 소중함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다시 만난 윤주상 선생님과 작품에 대한 많은 대화를 나누다 보니 프랭크의 마음에 깊은 연민이 생겨났고, 자아가 성숙해가는 리타의 모습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실제 나이에 비해 너무 어린 역할을 연기해야 한다는 것과 17년이라는 세월의 간극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관객들은 감사하게도 기대 이상의 많은 사랑을 보내 주셨다.

'리타 길들이기'가 연극열전 2의 흥행작으로 선정되며 앙코르 공연이 결정됐을 때도 '리타'와 나의 필연은 계속 이어졌다. 개인적인 사정과 주위의 좋지 않은 일들로 인해 무대에 서지 않으리라 마음먹었지만 "17년 만에 다시 만난 '리타 길들이기'의 성공을 축하하는 앙코르 무대는 '지금'이기에 의미가 있다"라는 지인의 말에 생각을 바꿨던 것. 마침 공연 준비가 다소 지연되면서 연습을 할 수 있는 적당한 시간까지 주어졌고, 또 한 번 예정된 것처럼 나는 '리타'가 되어 앙코르 공연에 합류하게 됐다.

17년 전 필연처럼 다가와 많은 사랑을 안겨주고, 다시 선 무대에서는 사람과 인생을 배우게 해준 '리타 길들이기'. 이번 앙코르 무대에서는 유종의 미와 함께 아름다운 추억을 선사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해본다, 이제 나는, 내 인생의 행운이었던 '리타'와의 마지막 시간을 축제처럼 즐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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