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 '문화 대통령'으로 가는 첫 걸음이기를

입력 : 2009.01.16 05:58
15일 오전 11시 서울 경복궁 건너편 옛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 강당.

강당에는 김수용 대한민국예술원회장을 비롯, 이어령 문화부 초대장관, 김남조 시인, 임권택 감독, 연극인 박정자씨,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영화 배우 안성기씨 등 문화예술계 인사들로 북적거렸다. 500여명의 문화예술계 주요 인사들이 신년 인사회가 있다는 초청장을 받고 입장해 있었다.

행사가 시작한 지 5분쯤 지났을 때 참석자들의 시선은 무대 위로 쏠렸다. 사회자의 소개와 함께 이명박 대통령이 김윤옥 여사와 함께 나타난 것이다. 이 대통령은 "이곳에서 신년 인사회를 하는 게 의미가 있을 것 같다"며 곧이어 풀어놓을 '선물'을 암시했다. 이 대통령은 "1996년 종로에 국회의원으로 출마했을 때 제가 내놓았던 공약이 이곳에 미술관을 세우겠다는 것이었다"며 "당시 함께 출마했던 상대 후보들은 '국회의원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저를 반박했다"고 밝혔다.
이명박 대통령이 15일 서울 옛 기무사 강당에서 열린‘문화예술인 신년 인사회’에서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의 서울관을 기무사 터에 세운다고 발표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이명박 대통령이 15일 서울 옛 기무사 강당에서 열린‘문화예술인 신년 인사회’에서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의 서울관을 기무사 터에 세운다고 발표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이 대통령은 잠깐 참석자들을 둘러본 뒤 말을 이었다.

"이제 대통령이 됐으니 힘이 좀 생긴 것 같습니다."

이 대통령이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의 서울관을 기무사 터에 세우겠다고 공식 발표하는 순간이었다. 대통령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다.

서울에 국립현대미술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문화계 인사들이 10년 넘게 외쳐온 숙원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1986년 경기도 과천 막계동에 문을 열었지만 관람객이 찾기에 불편했다. 대공원에 가려 입구조차 찾기 어렵다는 불평도 적지 않았다. 대부분의 나라가 국립현대미술관을 수도의 중심에 두는 것과 달랐다. 국민들이 가장 즐겨 찾는 장소가 돼야 할 현대미술관이 외진 곳에 남겨진 '섬'이었다.

미술관이야말로 교육 현장의 메카이자 창의력의 원천이라는 점에서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했다. 루이비통 등 세계적인 명품 그룹을 경영하고 있는 LVMH 그룹의 최고경영자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나 이베이의 전 CEO인 멕 휘트먼 등이 주말이면 미술관을 방문한다는 건 이미 많이 알려진 뉴스다. 예술가뿐만 아니라 이제는 CEO들도 경영에 대한 영감을 예술에서 얻고 있는 것이다.

강당에 있던 다른 문화계 인사들의 표정도 덩달아 환해졌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서울에 세워지는 것이 국내 문화계에 미치는 상징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이 지적했듯이 "변두리로 밀려나 있던 문화가 이제야 중심으로 옮겨와 자리잡는 계기가 된 것"이었다. 특히 문화계 인사들은 이 대통령이 "경제가 아무리 어렵다고 하지만 이후에 다가올 새로운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며 문화국가의 중요성을 강조한 점을 주의 깊게 들었다.

이 대통령은 "경제를 일으키고 문화국가를 만드는 게 오랜 꿈이었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소득만 높아진다고 일류국가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기무사 강당에 참석했던 한 인사는 "이 대통령의 말처럼 문화 수준이 받쳐주지 못하는 GDP 성장은 오히려 고통이 될지도 모른다"면서 "대통령이 문화에 대한 소신과 비전을 보여줘 우울한 요즘 좋은 선물을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프랑스의 미테랑 전 대통령은 "문화산업은 미래의 산업이며 문화에 대한 투자는 곧 경제적 투자"라고 말했다. 문화산업이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한 성장동력이라는 것은 많은 국가 지도자들이 느끼고 있는 바이다. 이 대통령도 자신의 오랜 꿈을 문화국가로 만드는 것이라고 소개한 만큼 기대를 걸어보고 싶었다. 이날 기무사 강당은 이 대통령이 '문화 대통령'으로서 진지한 발걸음을 떼는 현장이었으면, 하고 소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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