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예 아그네스, 새로운 별이 되다

입력 : 2009.01.07 09:54

연극 '신의 아그네스'

배우 윤석화의 복귀작으로 화제를 모은 연극 '신의 아그네스'/사진=설치극장 정미소
배우 윤석화의 복귀작으로 화제를 모은 연극 '신의 아그네스'/사진=설치극장 정미소

검은색 벽으로 둘러싸인 박스형의 무대 위에는 투명 아크릴 의자 두 개뿐이다. 어둠 속에서 청아한 목소리의 노랫소리가 잠시 들려오더니 이내 가는 빛의 핀라이트가 떨어진다. 무대 오른쪽에 정신과 의사 리빙스턴(윤석화 분)이 서 있다. 리빙스턴의 독백으로 극은 시작된다.

21세의 젊은 수녀 아그네스(전미도∙박혜정 더블)가 아이를 낳고, 쓰레기통에서 탯줄에 목이 감긴 채 숨진 아이의 시체가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누가 아이의 아버지이며, 누가 아이를 죽인 것인가? 당시의 모든 기억을 잃은 아그네스, 철저하게 진실을 숨기려는 미리암 원장 수녀(한복희∙지영란 더블)와 정신과 의사인 리빙스턴이 번갈아 빚어내는 2중, 3중 구도의 팽팽함은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동생이 수녀원에서 죽은 뒤로 신을 부정하게 된 닥터 리빙스턴은 이성적인 잣대로 아그네스의 임신과 아이의 죽음을 바라본다. 반면, 진실을 감춘 채 신이 만들어낸 기적으로 사건을 결론지으려는 미리암 수녀는 리빙스턴과 첨예한 대립을 이룬다. 시종일관 힘 있는 목소리로 극의 중심을 잡아준 미리암 수녀 역의 한복희는 선이 굵은 연기를 보여줬다.

그녀와 윤석화가 보여준 대립 장면은 대사를 주고받는 식의 쉼 없는 말들의 행렬이었다. 거침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사건의 진실을 향하고 있던 갈등의 본질은 어느 새 신의 이름으로 만들어지는 기적의 존재 여부로 바뀐다. 신과 인간, 신앙과 기적의 문제에 대해 각자의 입장을 이야기하고, 독백을 통해 자문한다. 아이의 아버지와 아이를 죽인 살인범 따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1983년 초연 당시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연극 '신의 아그네스'/사진=설치극장 정미소
1983년 초연 당시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연극 '신의 아그네스'/사진=설치극장 정미소
연극을 보는 2시간여 동안 리빙스턴이 연신 뿜어대던 담배 연기와 막간마다 아그네스가 직접 부른 노랫소리는 연극이 끝난 후에도 진한 여운을 남겼다. 아그네스와 대화를 나눌 때를 제외하곤 리빙스턴이 등장하는 모든 장면에서 담배 연기가 빠지지 않는다. 검은색으로 사방이 막힌 무대 위에 조명을 받아 잿빛으로 보이는 담배 연기는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내뿜는 힘과 방향에 따라 형태가 달라지는 담배 연기는 묘한 기운으로 단순한 무대에 또 하나의 배경 역할을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영롱한 목소리로 직접 노래한 전미도의 노래도 인상적이었다.

알코올중독자였던 아그네스의 엄마는 비상식적인 행동으로 어릴 적부터 아그네스를 사회와 단절시켰다. 집에 가둔 채 학교에 가지 못하게 했으며 성적 학대까지 감행했다. 그럼에도 아그네스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순수함과 고결함을 간직하고 있다. 리빙스턴이 그녀에게 생각나는 단어를 말해보라는 질문에 그녀는 ‘하나님’과 ‘사랑’을 차례로 이야기할 정도로 깨끗하다. 그녀의 백치에 가까운 순수는 극의 중반 이후, 리빙스턴의 이성적 잣대에 변화를 주며 그녀를 심리적 혼돈에 빠지게 한다. 그러나 리빙스턴은 본연의 임무였던 사건 파헤치기의 끈을 놓지는 않는다. 설득과 최면으로 리빙스턴은 결국 그날의 진실을 밝혀낸다.

기적은 없었다. 현실적 범주 안에서 꼼짝할 수 없는 진실 앞에 아그네스는 노래할 힘을 잃을 뿐이다. 최면에 걸려 진실을 토해내는 장면에서 아그네스 역을 맡은 신예 전미도는 그녀의 이름을 확실히 각인시킬 만한 연기를 보였다. 꾸밈없고 살아 있는 눈빛으로 보여준 밀도 있는 연기는 도저히 그녀의 연기 경력이 단 한 편의 뮤지컬뿐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대선배인 윤석화, 한복희와 함께 서는 무대임에도 불구하고 작아짐 없이 당당한 연기를 펼쳤다.

1983년 초연 당시, 아그네스 역으로 스타의 반열에 올랐던 윤석화가 처음으로 선보이는 리빙스턴에 공연 시작 전부터 관심이 모아졌다. 그녀는 세 명의 등장인물 중 가장 큰 감정 변화를 보이는 리빙스턴 역을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연기했다.

연극 '신의 아그네스'는 마지막까지 답을 주지 않는다. 불완전함을 극복하려는 세 여인의 삶을 통해 현실과 이상을 제시할 뿐, 결국 답은 관객의 몫으로 남긴다. 진정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행복의 본질은 무엇인지.

연극 '신의 아그네스'
일시 : 2008년 12월 6일~2009년 1월 10일 
장소 : 설치극장 정미소
문의 : 02-3672-3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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