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시절 어머니가 보낸 목장갑에서 영감 얻어

입력 : 2008.10.27 03:11   |   수정 : 2008.10.27 07:18

이중섭 미술상 수상작가 정경연
장갑 소재로 작품 30년… 국내외 미술계서 賞福
다양한 화학처리 시험… 전통 깬 순수미술 인정
"이중섭 이름만 들어도 설레… 초심으로 돌아가겠다"

정경연씨는 중₩고교생 시절 동양화와 서양화를 골고루 배운 뒤 섬유미술을 전공으로
택했다. 그녀는“내 마음대로 새로운 길을 시험해 보는 것이 내게 맞았다”고 했다.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제20회 이중섭미술상 수상자로 결정된 정경연(鄭璟娟·53·홍익대 교수)씨는 "작가라면 누구나 '이중섭' 이름만 들어도 떨리고 설레게 마련인데, 그분의 예술을 기리는 큰 상을 받게 돼 너무 기쁘다"며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뜻으로 알겠다"고 말했다.

정씨는 홍익대 미대 2학년 때 미국으로 유학해 매사추세츠 미대를 졸업하고, 로드아일랜드디자인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국내에서는 아직 섬유미술이 '순수미술'보다 '장식 미술'에 가깝다고 여기던 시절, 정씨는 거친 목장갑을 소재로 한 거대한 설치작품을 잇달아 발표해 우리 미술계에 충격과 경이(驚異)를 안겼다.

"고단했던 유학 시절, 서울에서 소포가 왔어요. 친정 어머니께서 '손 다치지 않게 조심하라'며 박스째 보내주신 목장갑이었지요. 코가 찡했어요."
어머니의 애틋한 사랑이 깃든 목장갑에서 정씨는 점차 더 깊은 의미를 찾아냈다. 장갑은 그녀에게 노동하는 손을 보호해주는 장치이자, 권력자의 손과 빈민의 손을 평등하게 감싸주는 장치였다.

정씨는 이후 30년 가까이 장갑을 소재로 한 작품을 꾸준히 발표했다. 1981년 백상기념관 전시회를 시작으로, 국내외에서 개인전만 28번 열었을 만큼 활발하게 활동해왔다.

그 과정에서 정씨는 석주미술상, 미술기자상, 대한민국디자인대상 근정포장, 국제섬유미술비엔날레 은상 등 굵직한 상을 여럿 수상했다.

'장갑 작가'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소재만 '장갑'으로 여일했을 뿐 회화·판화·조각·비디오아트·설치미술 등 다양한 매체와 장르를 시험하며 자신의 작품 세계를 확장해왔다.

정씨는 섬유미술을 전공으로 선택한 데 대해 "동양화니 서양화니, 추상이니 구상이니 하는 틀에서 벗어나 아무런 굴레도, 제약도 없는 분야에서 새로운 작품을 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자유분방한 기질 밑바탕에는 딸을 차별하지 않고 기른 집안 어른들의 가르침이 있었는지 모른다. 정씨는 고(故) 전진한 제헌의원의 외손녀이자, 정재철(80) 한나라당 고문의 장녀다. 서울 삼청동에서 3남매 중 맏딸로 자라난 어린 시절, 아버지는 제사를 지낼 때마다 외아들(막내) 대신 맏딸(정씨)에게 "네가 맨 먼저 절하라"고 했다. 정씨는 "어려서 '날 저물기 전에 귀가하라'는 것 말고는 다른 제약이 거의 없었다"고 했다.

정씨는 1980년부터 홍익대 교수로 근무했다. 그녀는 목소리가 허스키하다. 목이 아프고 숨이 막힐 때까지, 작업실에 틀어박힌 채 목장갑을 각종 염료에 담그며 다양한 화학처리 기법을 시험했기 때문이다. 전시회가 다가오면 하루 2시간씩 잤다. 덩치 큰 남자 제자들이 호리호리한 정씨보다 먼저 나가떨어지기 일쑤였다.

이중섭미술상을 안은 정씨는 그 동안 가장 뿌듯했던 순간 중 하나로 1980년대 중반의 어느 날을 꼽았다. 당시 정씨의 작품은 "응용미술 취급 받던 섬유미술을 명실 공히 순수미술의 한 분야로 끌어올렸다"는 호평과 "이게 무슨 섬유미술이냐"라는 혹평을 함께 받았다. 하루는 섬유미술 분야의 원로인 이신자(78) 전 덕성여대 교수가 정씨의 전시를 보러 왔다.

정씨는 "전통을 깬 내 작품을 보고 선생님께서 뭐라고 하실지 조마조마했는데, '내가 만날 책으로만 보던 작품을 네가 직접 하는구나. 잘했다' 칭찬하셨다"며 "그 일이 내게 큰 격려가 됐고,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고 말했다.

 


정경연(鄭璟娟) 약력

▲1955년 부산 출생

▲1974년 홍익대 미대 2년 수료

▲1978년 매사추세츠 미대 졸업(학사)

▲1979년 로드아일랜드디자인학교 졸업(석사)

▲1996년 모스크바 국립산업미술대학 명예박사

▲2008년 《정경연 30년 기념전》(세오갤러리), 2004년 《타이완역사박물관 초대전》(타이베이) 등 1981년 이후 개인전 28회

▲석주미술상, 미술기자상, 대한민국디자인대상 근정포장, 국제섬유미술비엔날레 은상 수상

현재 홍익대학교 섬유미술·패션디자인과 교수


 

이중섭미술상 20회 수상자 정경연 홍익대 교수. /김수혜 기자
이중섭미술상 20회 수상자 정경연 홍익대 교수 소감. /김수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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